1. 대만지도
1. 대만지도
1-1. 타오위안국제공항
1-1. 타오위안국제공항

세상을 살다보면 이웃이라고 해서 모두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듯이 허구한 날 우리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식민통치의 향수에 젖어서 동해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하지만 한반도의 제주도처럼 중국대륙에서 남쪽으로 약 161km 뚝 떨어진 작은 섬 타이완(Taiwan)의 ‘대만(台灣)정부’는 대륙을 통치하던 시절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벌이는 항일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승인해준 세계 유일의 우방이었다.

그런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가자 북방정책이란 정치논리로 하룻밤 사이에 단교하고,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배후조종하며 인해전술로 UN군의 1.4후퇴를 초래하여 남북통일을 가로막았던 중국공산당과 수교한 것은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잘 말해준다. 

타이완이라기보다는 ‘대만’으로 더 잘 알려진 섬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정부가 건너와서 1949년 타이베이(台北)를 임시수도로 삼은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당정부는 UN 창설의 주역으로서 여전히 강대국의 특권인 안보리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리다가 197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핑퐁 외교로 미국이 대륙의 중공(中共)과 수교하더니, 1971년 10월 중공이 국민당정부를 대신하여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대만은 UN에서 퇴출되었다.

중국을 대표하게 된 중공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되어 1972년 1월 미국과 수교하자 우리도 1992년 8월 수교하면서 대만정부와는 단교했는데, 대만정부는 우리의 갑작스런 단교에 지금까지 서운해 하고 있다고 한다. 

2. 지하철
2. 지하철
2-1. 오토바이
2-1. 오토바이

타이완이 세계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0년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발견하여 ‘프로모사((Ilha  Formosa: 아름다운 섬)’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이후부터다. 그 후 서구 세력이 잇달아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통상을 시도했지만, 명(明) 제국이 응하지 않자 1624년 네덜란드가 타이완의 남부 타이난(台南)을 무력으로 점령한데 이어서 1626년 에스파냐도 타이완의 북부 를 점령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더니,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1642년부터 타이완을 식민통치하는 한편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왕래하는 무역거점으로 삼았다.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네덜란드인들은 풍랑으로 제주도에 자주 표류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627년(조선 인조 5년) 베텔브레이(Weitervree: 한국명 박연), 1653년(효종 4년) 8월 항해 중에 난파되어 포로생활을 하던 중 13년 만에 탈출하여 서양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Hendrik Hamel : 1692~?) 등이 있다. 

한편 만주족인 누르하치(태조)가 만주를 통일한 뒤 후금을 건국하고, 그의 아들 태종은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1644년 명을 멸망시켰다. 이때 정성공이 명조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타이완으로 건너와 1682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네덜란드의 타이완 통치는 38년 만에 끝났다.

그런데 1839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청과 남경조약을 맺었지만, 청의 미온적인 자세에 불만을 품고 1858년 청의 관리가 영국선박의 영국국기를 밟았다는 트집으로 벌인 애로호사건(Arrow;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후 1858년 톈진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타이완의 단수이(淡水)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3. 대만총통부
3. 대만총통부
3. 타이베이경찰청 네거리
3. 타이베이경찰청 네거리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이 공동출병했다가 청일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한 청은 요동반도, 타이완, 대만해협에 있는 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일본에 할양하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했다.

타이완에 진주한 일본은 1945년까지 50년 동안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했는데, 이처럼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타이완에는 원주민의 토착문화를 비롯하여 정복자였던 에스파냐,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일본의 식민문화가 혼재된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여러 나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섬 전체가 마치 일본으로 여겨질 정도로 일본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4. 중경기념관 전경
4. 중경기념관 전경
5. 국립고궁박물관
5. 국립고궁박물관
5-1. 국립역사박물관
5-1. 국립역사박물관
5-2. 국립대만박물관
5-2. 국립대만박물관

대만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국호를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 하고, 여전히 중국대륙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지만,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중공 아닌 중국 역시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하여 타이완을 1개의 성(省)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 국제사회에서는 대륙의 중국을 유일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대만정부는 중국의 일부인 ‘중화 타이베이(中華臺北: Chinese Taipei)’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남북통일을 염원하듯 국민당정부는 대륙 회복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지만, 통일에 대한 전망이 점점 암울해지자 1980년 타이완 원주민을 중심으로 중국과 별도의 독립국을 주장하는 민진당(民進黨)이 결성되었다.

6. 101층 타워
6. 101층 타워

1987년 타이완은 40년 동안 시행했던 계엄령을 해제하고 2000년 총통선거에서는 민진당후보 천수이볜이 당선되어 본토 수복을 꿈꾸는 국민당과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이 대립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만 판 남남갈등’인 셈이다.

민진당은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완’을 강조하면서 탈 중국화에 노력하여 2016년 5월 총선에서도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2018년 11월 24일 국민투표에서 민진당이 참패해서 타이완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남북 약395km, 동서 약145km로서 남한(98,000㎢)의 약 1/3 정도인 섬(36,000㎢)에 2350만 명이 살고 있는 대만은 수도 타이베이(台北)를 비롯하여 신베이(新北), 타이중(台中), 타이난(台南), 가오슝(高雄), 타오위안(桃園) 등 6개 직할시, 지룽(基隆), 신주(新竹), 자이(嘉義) 3개 시, 1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 타이베이 인구는 235만 명이다. 대만은 1970년대 초까지 우리가 본받으려고 했던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서 2017년 말 우리의 1인당 GNP가 2만9500달러인데 반하여 2만5000달러에 머물러 있다. 1960년대 말까지 타이완은 베트남, 태국과 함께 자전거가 대중교통의 중심이었는데, 우리가 자동차시대로 들어선지 오래인데도 타이완은 아직까지 오토바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좁은 섬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대만은 우리보다 일찍 수출정책을 펴고 있어서 높은 무역의존도는 세계경제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단점도 있으나, 반면에 PC, 정보통신 등 중소기업 중심의 IT기술은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통화는 신타이베이화(新台弊: NT$, New Taiwan Dollar)라 하고 기본단위는 위안(元)이라고 하는데, 대만인들은 위안을 원(圓) 혹은 콰이(塊)라고 말한다. 통화 중 1, 5, 10, 20, 50위엔 등 소액 5종은 동전이고, 100, 200, 500, 1000, 2000위엔 등 5종은 지폐이다. 환율은 US 1$= 30.36위안(대만달러)이고, 우리 환율과는 1TWD= 36.70원이다(2018년 7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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