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와트마이어 사원 입구
1. 와트마이어 사원 입구

인류의 출현이래 지구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얼룩졌지만, 전쟁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탐욕스런 인간의 정복욕의 결과이다. 우리 역시 수많은 외침의 피해자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다. 동남아에서도 동족상잔의 긴 전쟁 끝에 통일된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나날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통일을 생각해본다.

킬링필드(Killing Field)란 말 그대로 대량 학살된 '죽음의 들판'을 뜻하지만, 캄보디아에서의 킬링필드는 이민족에 의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불과 한 세대 전인 1970년대 동족인 폴 포트(Pol Pot: 1925~1998) 공산정권의 크메르 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에 의해서 대량 학살된 자국인들의 집단 매장지를 지칭한다. 크메르 루주란 프랑스어로서 1968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인민군에서 분리된 캄푸치아 무장 군사조직을 말하지만, 캄푸치아 공산당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1-1. 사원 불탑
1-1. 사원 불탑


1864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1954년 독립된 캄보디아는 왕족의 후예인 노로돔 시아누크(Samdech Norodom Sihanouk: 1922~2012)가 초대 수상이 되었는데,   그가 집권하던 1963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미국은 시아누크에게 후방기지 제공을 요청했으나, 시아누크가 이를 거부하면서도 북베트남에게는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군수물자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묵인하자 미국은 캄보디아의 론 놀 장군을 지원하여 시아누크를 쫓아냈다.

론 놀 정권하에서 미국은 베트남 전선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여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으나, 오폭으로 캄보디아인이 다수 희생되자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캄보디아 공산당은 반미사상을 조성하면서 1968년 1월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2. 와트마이 사원
1-2. 와트마이 사원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사(Saloth Sar)라고 하는데 그는 승려 생활도 하고 프놈펜의 기술학교에서 목수 일을 배우던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1940년대부터 역시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의 호치민이 지휘하는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46년 공산당원이 된 그는 1949년 8월 파리에 유학 갔으나 공부보다는 혁명 활동에 더 심취했다. 1953년 1월 귀국한 그는 1963년까지 프놈펜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1960년 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고 1963년 제2차 당 대회에서는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베트남이 통일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론 놀 정권도 무너지자 4월 17일 크메르 루주군이 수도 프놈펜에 입성할 때 내전에 시달리던 캄보디아인들은 폴 포트의 군대를 해방군이라며 열렬히 환영했다.
 

2. 킬링필드 기념관
2. 킬링필드 기념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는 카키색 군복에 붉은 색 머플러를 목에 둘렀는데, 그 해 5월 총리가 된 폴 포트는 국호를 캄푸차(Democratic Kampuchea)로 바꾸고, 사유재산제 폐지와 집단농장제를 시행했다. 폴 포트 정권은 도시를 자본주의와 친미 세력의 온상이라 규정하고, 200만 명에 달하는 프놈펜 시민을 단 사흘 만에 모두 도시 밖으로 내몰았다.

프놈펜에서 쫓겨난 시민들은 크메르 루주가 지정해준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공산혁명에 방해가 되는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는 물론 수많은 승려들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사용하거나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000명까지 학살하고, 심지어 안경을 썼거나 손이 뽀얀 사람들을 지식이라 하여 처형했다.

총알을 아낀다며 이들을 구덩이를 파거나 우물에 집어넣어 집단 매장하기도 했다. 1975년 5월부터 1979년 1월까지 4년 동안 800만 명 국민의 1/3에 해당하는 약 270만 명의 지식인과 반공주의자들이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한 통계에 의하면 캄보디아 전국의 의사 800명 중 760명, 545명의 판사 중 541명의 지식인들이 처형되었으며, 3000개가 넘는 사찰이 파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9년 통일된 베트남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과 내전이 벌어지자 밀림으로 쫓겨 간 폴 포트는 게릴라전을 벌이며 정권회복을 노렸지만. 1997년 6월 부하에게 체포되었다가 1998년 4월 밀림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2-1. 희생자 사진들
2-1. 희생자 사진들
3. 희생자유골 보관소
3. 희생자유골 보관소
3-1.  희생자 명단
3-1. 희생자 명단

캄보디아에서는 공식적으로 1991년 내전이 종결되고, 1993년 UN의 관리 아래 왕정이 복구되었다. 캄보디아 새 정부는 수도 프놈펜과 전국 주요도시에 폴 포트 정권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아서 기념관을 만들어 대량 학살의 역사를 추모하고 있는데, 약 1만7000명의 시신을 매장한 수도 프놈펜 인근의 쯔응아익(Cheung Ek)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약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씨엠립에도 폴 포트 공산정권에 희생된 희생자의 유골을 신체부위별로 구분해서 전시해 놓은 와트 마이 사원(Wat Thmei)이 있다. 이곳은 당초 사원을 지으려고 땅을 굴착하던 중 수많은 유골이 발굴되자, 사원 앞마당에 발굴된 유골들을 모아서 전시관을 지어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중전화 부스 같은 좁은 건물 안에 희생자의 유골을 해골은 해골대로, 다른 신체의 뼈들은 뼈들대로 차곡차곡 쌓아둔 것은 보기에도 무척 혐오스럽다. 또 폴 포트 정권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유물 자료들을 전시하는 기념관도 있지만, 건물 상태나 전시물의 내용들은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는 것에서 국가의 국력을 짐작하게 한다.
 

4. 폴 포트
4. 폴 포트

캄보디아에서 대량학살의 후유증은 내란이 끝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기피하여 문맹률이 60%가 넘고, 또 나라를 이끌어나갈 지도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발전이 더디다고 한다.

폴 포트 정권의 잔학상은 1984년 미국의 롤랑 조페(Roland Joffe) 감독이 제작하고, 샘 워터스톤(Sam Waterston: 시드니 샌버그 역)과 행 S. 응고르(Hang S. Ngor: 디스 프랜 역)가 주연한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통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또 내전이 종료된 후 UN은 10년 가까이 협상 끝에 2006년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전범재판소(ECCC)를 출범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의 실력자 중 폴 포트에 이은 제2인자인 누온 체아(92)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87) 국가주석을 체포하여 2014년 1심에 이어 2018년 11월 16일 항소법원에서도 각각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1인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 이미 사망함에 따라서 법정에 세우지 못했지만, 이 판결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인종청소가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을 확인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한다.

어떤 국가이든 오랜 역사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청산해야 할 과거사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만, 과거사 청산이 불철저할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기 쉽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동안 일제에 부역하면서 민족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친일파에 대한 불철저한 처벌이 오늘날까지 큰 후유증을 안겨주고 있는 점도 한번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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