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올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매출이 832억 달러(95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다. 관련 분야 세계 1위다. 그러나 삼성 반도체가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다는 뉴스는 필자 같은 비전문가들에겐 대단한 뉴스는 아니다.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도체 세계 1등’의 의미는 필자도 제대로 몰랐다. 

지난 추석 때 한 모임에서 관련 분야 전문가인 한 친구로부터 ‘즉석 퀴즈’를 받고서야 새삼 알게 되었다. 친구는 먼저 ‘세계의 5대 곡물’이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물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옥수수 밀 쌀 콩 감자라고 일러준 뒤, 이번에는 5대곡물의 전세계 생산량이 얼마나 될지 추측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말해줬다. ‘우리나라 반도체 생산량’이 답이었다. 

"세계 5대 곡물 생산량과 맞먹는 한국 반도체 생산량"

5대곡물의 전세계 연간 생산량(1200억 달러)과 우리나라 반도체 매출 규모(1200억 달러)가 비슷하다는 게 요지였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생산량(세계 1위 삼성전자와 3위 하이닉스를 합한 매출액)이 전세계 60억 인구가 주식으로 소비하는 곡물 금액과 맞먹는다는 것이었다.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쌀’로 불린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자산업의 쌀을 실제 식량으로 환산하면 전세계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규모라는 말이다.

이런 1등은 거저 이뤄진 건 아니다. 반도체 1등은 그 분야 과학기술의 1등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의 힘의 원천은 과학기술이다. 삼성이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꽤 알려져 있다. 세계 유수의 대학을 돌며 그야말로 최고의 인재를 찾고 양성한다. 이들에 대한 대우도 대단하다.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인재에게는 용처도 묻지도 않는 돈을 10억 씩 지급한다고 한다.

과학기술은 기업만의 과제는 아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벌이는 미중 무역분쟁의 핵심도 과학기술이다. 미국은 추격해오는 중국의 과학기술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지분이 25%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주요 기술에 투자하는 걸 제한하는 규정을 발표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중국 관영언론은 미국의 기술 차단은 중국의 발전을 막을 수 없다며 반발했다. 한쪽은 따라잡으려 하고 한쪽은 따돌리려는 안간힘이다.

국가에서든 기업에서든 과학기술은 ‘1등의 조건’이지만 약소국이나 독재자에겐 ‘생존의 무기’도 된다. 북한 정권에게 핵기술 과학은 생존 무기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중요한 실험이 성공하면 과학자들을 업어주고, ‘맞담배 세리모니’까지 벌인다. ‘과학자 거리’를 만들어 아파트를 공짜로 주고 전용식당도 만들어준다. 인구 2500만의 최빈국 지도자가 3억2000만 세계 최강국 대통령을 상대로 세계가 긴장하는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남한도 한때 ‘김정은의 길’을 모색한 적이 있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핵개발은 북한 정권과 다를 바 없다. ‘대전 기계창’이라고 불리던 곳이 바로 핵개발을 위한 비밀연구소였다.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도 그때 만들어졌다. 카이스트는 이제 세계 유명대학들과 겨루는 일류 대학이 되어 있고 ETRI(전자통신연구소) 같은 연구기관들은 세계적인 통신기술을 개발, 커다란 부가가치를 올렸다. 박정희는 핵개발에는 실패했지만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이제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작은 가난뱅이 국가에서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과학기술 덕이라고 봐야 한다. 우린 40~50년 전에 뿌린 과학기술 투자의 과실을 따먹고 있다. 무역액 규모 세계 6위 반도체 1등은 과학기술의 공이다. 

과학기술에 영원한 1등은 없다. 세계 1등 미국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이유고 중국이 필사적으로 따라잡고자 하는 까닭이다. 1등인 나라도 중간인 나라도 꼴찌 탈출을 애쓰는 나라도 과학기술은 소홀히할 수 없다. 20년을 잃어버린 나라로 조롱받던 일본이 다시 앞질러 나가고 있고, 중국조차 곧 우리를 뛰어넘을 기세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과학기술에 손을 놓고 있다.

‘권력의 밥그릇’으로만 남은 한국 과학기술

이명박 정부가 행정수도 폐지의 대안으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계획을 만들었으나, 후임 박근혜 정권이 반쪽으로 만들더니 문재인 정부에서도 찬밥이다. 정부가 관련 예산을 깎고 늦추면서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언제부턴가 과학기술에는 별 관심이 없고, 과학기술기관이란 권력의 ‘밥그릇’에만 신경을 쓴다. 연구기관들이 신(新)권력의 전리품으로만 쓰이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구기관 윗자리가 한꺼번에 물갈이되는 일이 주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관장은 11명에 이른다고 한 신문은 보도했다. 신문은 ‘역대 정권 최악의 과학계 칼바람’으로 평하고 있다. 이번에는 카이스트 총장까지 날아가는 듯하다. 과학기술부는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을 횡령과 배임의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점이 더 주목받고 있다. 

한 전직 연구원은 말한다. “권력과 가까운 사람이 새로 장(長)이 되면 정부에서 돈을 더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황당한 얘기다. 작금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가려진 얼굴이다.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이런 풍토에 적응하기 어렵다. 연구단지 과학자들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연구기관을 떠나기 시작한 지도 오래다.

과학기술은 1등 국가 트럼프에게조차 욕을 먹어가면서도 지켜내야 할 대상이고, 2등 국가 시진핑에겐 미국을 따라잡기 위한 절박한 수단인데, 지금 대한민국 권력자들에게 과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뜯어만 먹는 과학일 뿐인가? 혹시 ‘삼성 1등’만 믿는다는 것인가? 이런 나라에서 그 1등이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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