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

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일본어를 배우는 중이다. 작년 초에 시작했으니 얼추 2년이 다 되어 간다. 어딘가에 필요해서,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고 시작한 건 아니다. 단지, 매양 그 날이 그 날 같은, 변화 없이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 혹시 신선한 자극이 될까싶어 무작정 시작해 본 일이다. 어느 한 편으로는 몇 달 간격으로 아버님, 장모님, 동생을 차례로 여의면서, 한 해 동안 세 번의 장례를 치르느라 가슴 한 구석에 무지근히 자리한 채 쉽게 떨쳐지지 않는 슬픔, 안타까움, 허망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뭔가 새로운 것, 전혀 생뚱맞은 것에 매달리다보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없잖아 있었을 게다.

하필이면 왜 일본어였는가. 그건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천근만근 무거운 몸, 마음으로 퇴근하던 길. 지하도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려 출구에 멈춰서 무심코 바라 본 곳에 우연히 일본어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순간 뜬금없이 일본어나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 즉시 학원을 찾아가 곧바로 수강등록을 해버린 것이다.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아있는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있던 차에 마침 일본어가 눈에 띤 셈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을 갑작스레 시작하면서도 처음부터 아예 3개월분을 등록했다. 한 달 치만 등록하면 쉽게 포기해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접수 담당직원에게 ‘내가 뭐라 해도 절대 환불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탁까지 해가면서 등록을 했다. 불쑥 저질러 놓고 보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인데, 마치 오래 전부터 별러오던 일을 단단한 결심 속에 시작하는 모양새를 갖춘 셈이다. 이처럼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을, 갑자기 시작했음에도 중단하지 않고 2년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신통하고 대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시작한 일본어가 요즘의 내 생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처음 시작하면서는 한 1년 배우면 대충 지껄일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판 자신이 없다. 배우는 데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느라고 한 편이다. 학원에서 내준 교재 외에 서너 권의 책을 따로 마련해서 학생 때도 않던 예습, 복습까지 해가며 강의를 들었다. 일어공부에 할애하는 시간도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바쁘지 않을 때면 일과시간에도 틈을 내고, 매 주말 별일이 없으면 사무실에 나와 일어를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기 일쑤다. 또 밤에 잠이 안와 뒤척일 때도 일어 책을 펼쳐 놓고 볼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작년 초부터 내 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부분이 일본어 공부인 셈이다. 그런데도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질 않으니 그냥 느긋하게 배워보리라 작정했음에도 불쑥불쑥 초조해 질 때가 많다.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무엇보다도 ‘단어’가 제일 문제인 것 같다. 단어가 도통 외워지질 않는다. 아주 기본적인 단어들조차 깜박깜박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렵게 새로 익힌 단어들은 강의실을 나서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우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시작한 지 1년 쯤 됐을 무렵, 마침 어느 모임에서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간다기에 만사 제쳐놓고 따라 나섰다. 내심 일본에 가면  다만 몇 마디라도 지껄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설렘 속에 출발했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도착해서 뭔 말인가를 좀 해 볼라치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도통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거였다. 심지어는 입에 붙다시피한 ‘오하이요 고자이마스’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고, 엉뚱하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가 튀어나온 판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민망한 노릇이지만 핸드폰을 꺼내들고 통역앱을 뒤적거려야만 겨우 한마디 지껄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여행 중에 있던 얘기를 건네며 일본어 배우기를 때려 치울까보다고 하소연했다. 얘기를 들은 아내 왈 ‘외국어 배우는 게 치매 예방에 최고라던데, 치매 예방 약 먹는 셈치고 그냥 계속 배워 보슈. 일본어 배워서 어디 써먹을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안달을 하고 그래요?’라며 지청구를 해댔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아내 말대로 지금 일본어를 배워서 어디 써먹을 것도 아니고, 그냥 취미삼아, 혹시 일본여행이라도 갈 경우 다소 자유롭게 행동하기 위해 배우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져 그냥 계속 배워보기로 했다.

하여튼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집어치우지 않고 이제까지 2년여를 버텨왔다. 내 평생 제일 느긋하게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젊은 친구들은 같이 시작한 지 두어 달만 지나면 회화가 제법 능숙해져 상급반으로 옮겨가는데, 나는 그냥 같은 내용을 벌써 몇 차례나 반복하여 수강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급반으로 옮긴다 해도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다. 많은 사람들이 그 학급을 거쳐 가는 동안 나는 터줏대감인양 그냥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어쩌다 한 번씩 어렵게나마 무슨 말인가 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아주 허사는 아닌 셈이다. 진도가 느려 막막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재미를 잃지 않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주말 오후 혼자 사무실에 나와 컴퓨터를 켜고, 사전을 찾아가며 예습, 복습을 하노라면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뿌듯하다. 때로는 인터넷으로 어찌어찌 어렵게 일본 드라마를 찾아보는 중에 뭐 한마디 아는 소리라도 들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늦은 나이에 공부랍시고 하다 보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무료하지 않아서 좋다. 옛날처럼 그냥 멍하니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시간이 아깝기 짝이 없다. 주말에 틈이 나면 사무실로 향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사무실에 뭔 꿀단지라도 묻어 놓았느냐고 빈정대기도 한다. 아내 말처럼 사무실에 꿀단지로 여길 만한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일본어 공부도 하고, 일본드라마도 찾아보고, 또 때로는 이러저러한 책들을 들쳐보기도 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 집에서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며 TV 채널만 돌려대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 그런 자잘한 재미가 어쩌면 일본어공부를 시작하면서 얻어진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을, 머리에 쥐가 나도록 열심히 공부해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지껄이지 못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후회되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 두자니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공력이 아깝고, 계속하자니 답답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어쨌든 그냥 이대로 일본어를 계속 해보자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아내 말대로 치매 예방의 한 방도로,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한 방법으로, 또 한편으로는, 가느다란 희망이지만 일본을 좀 자유롭게 여기 저기 돌아다녀보자는 꿈을 안고, 그냥 지금처럼 느긋하게 공부해 보려한다. 어쨌든 간에 나이 들어서 겨우 찾아 낸 재미있는 소일거리인 일본어를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공부해 볼 작정이다. 그래서 오늘도 안경과 돋보기를 함께 챙겨들고 일어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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