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47] 국민 신뢰 상실한 사법부, 흔들리는 법치국가

대법원 대법정홀 중앙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왼쪽)과 서양의 정의의 여신상. 인터넷 포털 자료사진.
대법원 대법정홀 중앙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왼쪽)과 서양의 정의의 여신상. 인터넷 포털 자료사진.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대법원에 가면 중앙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서양의 여신상과는 좀 다릅니다. 일단, 앉아 있고요. 그리고 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또 긴 칼 대신 한 손에는 저울과 다른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습니다. 옷은 마치 한복과 같은 전통 의복을 입었습니다.

나라마다 정의의 여신상의 생김새나 자세, 들고 있는 물건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눈을 가렸든 그렇지 않았든, 저울을 들었든 칼을 들었든,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무슨 대수겠습니까. 중요한 건, 모두가 하나같은 ‘정의의 여신상’이란 겁니다. 그리고 정의의 여신상은 궁극적으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3일, 한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현직 부장판사가 내부 온라인망에 200자 원고지 28매 분량의 글을 올렸는데요. 그중 일부입니다. “법관이 법관에 대한 탄핵을 의결한 2018년 11월 19일은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긴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버린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11월 19일은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속 판사들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된 동료 판사들 탄핵 촉구안을 의결한 날입니다. 총 105명 대표 판사들이 참여해 53명이 결의안에 동의하고 52명이 반대 또는 기권했습니다.

이러자 법관회의 소속 현직 부장판사가 ‘판사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법관대표회의 판사들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올린 글입니다. 법관회의 내에서도 ‘파(派)’가 갈린 모양입니다.

대법원은 지난 27일 법관회의가 의결한 ‘법관 탄핵 촉구안’의 법률적 효력을 부인하는 의견서를 국회에 냈습니다. 어쩌자는 걸까요?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해 일해야 할 법관들이 법전을 덮고,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으니.

같은 날 벌어진 광경입니다. 출근하던 김명수 대법원장 차량에 화염병이 날아들었습니다. 대법원장이, 그것도 대법원 청사에서 사실상 ‘테러’를 당한 겁니다. 사법 역사상 처음이랍니다.

대법원장에게 화염병을 던진 이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강원도에서 돼지농장을 하던 그는 몇 해 전, 유기농 쌀과 일반 쌀을 배합한 사료를 돼지에게 먹여 친환경 인증 자격을 박탈당했답니다. 그러자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는데요. 3심까지 모두 패하면서 소송비용을 부담할 처지에 놓이자 화염병을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김 대법원장은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사상 초유 사태를 바라본 국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최근 음주운전 사고나 패륜 범죄와 관련한 법원 판결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 재판부와 법이 존중받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이번 테러 역시 사법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신뢰 상실이 불러일으킨 ‘일탈’은 아니었을까요.

정의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아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겪어내는 일들이 정말로 정의인가? 물어볼 수 있는 절차가 확보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김제동의 헌법 독후감》(김제동, 나무의마음, 2018)

사법농단(司法壟斷). 법을 심판하고 사법권을 관장하는 권력기관에서 행하는 권력이 국민을 위한 공익을 추구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반 헌법적으로,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이익이나 권리를 독점했다는 뜻입니다.

2018년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른바 ‘양승태 사법농단’에 그 권위와 신뢰가 추락할 대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전직 대법관들과 관련 인사들이 줄줄이 수갑 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법관이라는 사람들이, 권력자 주변에 있는 소수집단 이익을 위해,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이해관계자들과 국민을 기만하고, 속이고, 피해를 주면서 사법 권력을 악용했다니.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의 독립’입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굳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더라도 양심이 없는 법관이 진행하는 재판은 재판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재판을 위해 법관의 양심과 양식이 필요한 경우는 많다. 결정은 그저 법률의 자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과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에 비추어 법률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관의 양심은 필수적 전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은 그저 타고난 것이거나 어느 순간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그 무엇이다. 《지금 다시, 헌법》(차병직 외, 로고폴리스, 2018)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고등학교 정문이나 유명 학원 건물 외벽에 서울대학교 법학과 합격생 명단이 적힌 현수막이 대문짝만하게 걸렸습니다.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실력에 남발했던 감탄사는 오늘 아침 내뿜은 입김처럼 가벼웠다는 생각입니다.

며칠 전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충청권 서울 주재 기자들과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삼권이 분리됐다고 하지만 권력에 휘둘린 사법농단으로 사법부를 보는 국민들 신뢰가 추락했다는 말과 사법개혁 필요성을 전했습니다. 박 장관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법원 판례에 대한 비판도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언론의 비판을 받습니다. 그만큼 사법권 독립을 중시했고, 보호해 줬지요. 그런데 최근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법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폐쇄적이면 내부에서 부패할 수 있습니다. 성역은 없는 겁니다. 사법부 독립이란 건 재판의 독립이지, 사법행정의 독립이 아닙니다. 재판의 독립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사법행정은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느 누가 독점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법행정과 인사권이 재판과 결합돼 있었잖아요. 그렇다보니 그걸 ‘사법부 독립’이란 이름으로 권력이 형성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법농단은)지금 수사가 진행 중이니 잘 마무리 짓고 사법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지요.”

우리나라 ‘정의의 여신상’을 보는 법조인들과 법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는데요.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앉아 있는 건 다리가 아파서라기보다 서 있을 때보다 안정된 자세로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는 의지라고 보고요. 칼 대신 법전을 든 이유는 강압적이기 보다 원칙대로 심판하겠다는 거라고 보고요. 눈을 뜨고 있는 건, 눈을 가렸을 때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진심을 바라보고, 눈을 가리지 않아도 정확히 심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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