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우리는 사랑을 빙자해서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얻습니다. 그것을 ‘자애(自愛)’라고 합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너)은 누구입니까? 당신(너)은 또 다른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자녀, 친구, 가족에게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해줍니다. 사실 자신이 받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타인에게 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자신에게 해주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에게 해주는 것이 곧 너에게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너에게 해 주는 것이 곧 나한테 해주는 것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너’가 아닌 ‘나’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천원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나랑 친하닌까 이것은 그냥 해줄 수 있겠지?’라는 기대욕구로 상대방을 대하다보니, 그렇게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분노하고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합니다. 생활의 모든 면을 자신과 함께 대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사고일 뿐입니다. 타인을 또 다른 ‘나’로 존중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러기까지는 어쩌면 처절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렸다고, 깨달았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너’는 또 다른 ‘나’ 그 속에 있는 자신이 초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면 즉, 윤리,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라면 농도가 짙은 내용물을 물과 희석하듯이 자신을 희석시켜야 합니다. 잘 희석시켰을 때는 자신을 제대로 관찰하게 되는 강점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아를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석되지 않고 변질되면 그것은 ‘감시’가 됩니다. 예컨대, 자식이 공부를 하는지를 감시하고 있거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결국 눈치를 보는 자식이 또 다른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하면서 약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동전의 양면처럼 교만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성공했다고 스스로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정체되거나 타락하기 쉽습니다. 교만과 결핍은 우월과 열등과 같습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는 것은 쉽지만 과거보다 오늘이 나은 삶을 살아 갈 수 있느냐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나’가 누군가의 마중물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월과 열등이란 옷을 함께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또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입니다.

‘너’는 또 다른 ‘나’이기에 서로에게 상처 입게 됩니다. 아파야만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상처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또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픔을 통해서 과거에 비해 조금 성숙한 아이가 되어갈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외로움 때로는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두려움과 불안을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하는 행복을 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충분히 성숙시킬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최고의 치유자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나’를 사랑으로 안아주는 오늘이 되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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