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44] 한반도 비핵화 시계를 보는 시선

북미 고위급회담이 갑작스럽게 연기됐습니다. 고위급회담은 정상회담에 앞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얼 갖고 회담할 건지 논의하는 전초전 성격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당초 어제(7일)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했지만, 하루를 남겨둔 시점에서 전격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북미 고위급회담에 잔뜩 기대를 걸었던 우리 정부도 “괜찮다”는 반응을 내놓긴 했지만, 내심 당혹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고위급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 윤곽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을 테니까요.

그래야 지난 9월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약속한 연내 서울 방문(답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요. 또 종전선언까지 이르는 길이 순탄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북제재 완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맞바꾸려는 북미간 줄다리기는 여전히 팽팽해 보입니다.

한반도 평화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문 대통령은 국내외에서 ‘열일’ 중입니다. 지난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지난 29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산행에서는 “(김정은 위원장 답방 때) 원한다면 한라산 구경도 시켜줄 수 있다”며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분위기 띄우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또 오는 13~18일 아세안(ASEAN) 관련 정상회의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순방 기간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만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비핵화 시계가 잘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정말 한반도에 평화가 오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민들이 차츰차츰 늘어가는 분위기입니다.

어떤 분은 툭하면 쏘아대던 미사일이 잠잠해지고, 올해만 해도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났으면 ‘굉장한 진전’ 아니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이전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공포에서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비핵화와 종전선언이 있기 전까지 한반도는 아직 정전상태입니다.

게다가 국내 경제위기는 그동안 한반도 평화체제로 떠받치고 있던 대통령 지지율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 업체인 리얼미터 측은 “북미 비핵화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평양정상회담으로 급격하게 고조되었던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이 줄어들고, 주가급락, 경제성장률 둔화 등 각종 경제지표의 악화 소식 등 영향”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 발행 ‘이슈와 논점’(1516호) 참조.

또 하나는 대북 제재 조치 속에 추진 중인 남북 경제협력(경협) 문제입니다. 현재 남북 경협의 핵심은 철도와 도로 연결인데요. 유엔에서 북한의 제재 조치를 완화 또는 해제하지 않는 한 경제 관련 사업은 대북제재 위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 외교안보팀 이승열 입법조사관은 최근 발행한 ‘이슈와 논점’(1516호)에서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남북경제협력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지만, 대북제재 유예 및 완화 없이는 철도·도로연결 등 경협사업 자체가 어려운 만큼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남북경협 성공을 위해 제재 집행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제재 적용의 ‘유연성’을 적극 활용해 먼저 북한의 비핵화 준수의 수준과 범위에 대한 한미간 공통된 인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지금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탈출구로 개방 제스처를 보내고 있지만, 결국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뭘 해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순순히 대북제재를 풀어줄 미국도 아니고요. 그러니 ‘리틀 로켓맨’이라 불리던 김정은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거겠죠. 김정은이 언제 또 심통을 부려 “내 책상엔 아직도 핵미사일 버튼이 있다”고 할지 모르니까요.

아직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둘러싼 ‘판’은 깨지진 않아 보입니다. 다만, 서로가 양보하지 않고 버티다 보면 중간에 끼인 사람들만 피곤해집니다. 당장 보세요. 우리 경제 얼마나 어렵습니다. 청년들은 좁은 취업문에 아우성이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도 못살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도 국가는 경제 위기는 뒷전이고, 외교와 안보에만 관심을 쏟는 것 같으니 민심이나 여론이 좋을 리 없겠죠. ‘판문점의 봄’이 ‘평양의 가을’까지는 잘 갔는데요. ‘서울의 겨울’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정은은 과연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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