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무척 화가 났었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진다.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시립도서관은 참 좋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물론이고 노트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트북 실’도` 마련해 놓았다.

노트북 실에서 지난번 쓰다 만 글을 불러와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뭔가를 얘기하려는 것 같았다. 도서관이다 보니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내 노트북이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뜻을 모르겠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결심한 듯 상체를 앞쪽으로 향하며 조용히 말했다.

“키 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요.”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는 일반 열람실이 아닌 ‘노트북 실’이거늘 키 판을 두드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그럼 식당에서 젓가락 소리가 나는 것도 비난 받을 일인가? 나는 치밀어 오른 부아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항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완수한 군인처럼 자신의 노트북만 들여다 볼 뿐 나에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한마디에 나의 페이스는 흐트러졌고 신경이 쓰여 더는 키 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노트북 실’을 찾았고 관찰을 통해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노트북 실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소음을 줄이기 위해 ‘키 스킨’을 사용하고 더 세심한 사람들은 무 소음 마우스와 무 소음 키보드를 이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을 찾아보니 그것과 관련된 상품들이 많았고 나도 무 소음 마우스와 키보드를 구입했다.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사용하다 보면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마우스 클릭 소리와 키 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다.
“참 딱하시네요.”

오래전에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게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여자였고 그녀는 나보다 훨씬 어렸다. 이 말을 건네며 그녀가 짓던 안타까운 표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의 표정은 타인을 위한 배려를 해달라고 항의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허리가 좋지 않았고 한의원으로 치료를 다녔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고 나면 간호사가 물리치료를 해주었는데 이 시간이 무척 길고 지루했다. 찜질과 전기자극까지 합치면 대략 30분 정도. 물리치료를 받으며 지루함을 덜기 위해 스마트 폰에 저장된 음악을 들었다. 셋째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도 나는 물리치료를 받으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갈 즈음 1인용 침대 위에 설치된 커튼이 열리며 간호사 고개를 디밀었다.
“음악 좀 꺼 주시겠어요?”

그녀의 냉랭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뜨끔했지만 나는 누운 채로 다른 사람에게 방해 되지 않게 작게 듣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음악을 꺼달라고 요구했다.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잖아요. 나는 짜증을 내며 음악을 껐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왜 자기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커튼을 닫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자꾸 내 귀를 맴돌았다. 다들 왜 자기 생각만 하는지…… 누워서 그녀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물리치료를 받으며 음악을 듣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걸려온 전화도 받았을 것이다. 1번 침대에선 트로트 음악, 2번 침대에선 오페라, 3번 침대에선 “세금계산서는 입금 하면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입금 먼저 하시라니까요.” 간호사인 그녀는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을 꺼달라고, 작은 목소리로 통화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다들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중에 몇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지 않았을까.

어르신들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얘기지만 쉰이 넘으면서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워진다. 내가 두려운 것은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나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같은 어른은 아니지 않는가. 만원버스에서 사람들의 어깨를 밀치며 들어가고, 전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침을 아무 곳에나 탁탁 뱉는 사람이 과연 어른일까. 어른은 어른다운 행동을 할 때 진정한 어른이 된다. 타인을 배려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마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나뭇잎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이제 곧 서리도 내릴 것이다. 그러면 옷깃을 추켜세우게 되겠지. 깊어가는 가을에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 곰곰이 고민해 본다. 인생을 논할 때 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생각했던 것이 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아침에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고, 점심에는 음식점 서빙아줌마에게 수고한다는 말을 하고, 저녁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호프집 알바 젊은이의 등을 두드려 주는 사람. 나는 그런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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