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씨엠립 지도
1. 씨엠립 지도

825년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802~850)가 앙코르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프놈 클렌(Phnom Kulen) 언덕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캄부자(Kambuja)’라고 했는데, 캄부자는  오늘날 캄보디아(Cambodia)라는 국호의 시초가 되었다.

몇 년 후 자야바르만 2세는 툰레삽 호수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877~889)가 새 도읍지 앙코르톰(Angkor Thom) 건설을 시작했다. ‘앙코르’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나라’ 혹은 ‘도읍’을 뜻하고, ‘톰’은 크메르어로 '크다'를 의미하므로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를 의미한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착수한 앙코르톰 조성공사는 야쇼바르만 1세(YasovarmanⅠ: 889~910)때 완성되었는데, ‘바르만(varman)’이란 크메르어로 나라와 백성들의 "보호자"를 의미한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6세기 동안 전성기였던 앙코르왕조의 도읍지였던 씨엠립(Siem Reap)에는 곳곳에 앙코르왕조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씨엠립이란 크메르어로 "시암(태국)을 격파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1. 앙코르톰 지도
1-1. 앙코르톰 지도

씨엠립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6.5㎞쯤 떨어진 앙코르왕조 최대의 사원 앙코르 와트(Angkor Wat)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1.5km 떨어진 곳에 앙코르 왕조의 왕성 앙코르톰이 있다. 앙코르톰은 가로 3km, 세로 4km의 사각형 도시에 인구 1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였고, 동서 약1,5km, 남북 약1,3km 직사각형 사원인 앙코르와트는 앙코르톰보다 약1세기 가량 늦게 조성되었다.

앙코르와트가 앙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사원이라면 앙코르톰은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왕성이었는데, 앙코르톰은 불교의 이상세계인 만다라(慢茶羅)를 형상화한 거대한 계획도시로서 이 시대에 세계 어느 국가의 왕성보다 거대한 도시였다.

1-2. 진랍풍토기
1-2. 진랍풍토기

 앙코르톰은 폭 100m의 해자로 둘러싼 8m나 되는 높은 성벽 안에 있어서 앙코르톰 출입은 성문과 연결된 해자(垓子) 위에 놓인 다리를 통해서만 건너다닐 수 있었는데, 해자에는 악어를 길러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고 한다. 앙코르톰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대문과 승리의 문 등 5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동문은 생명 창조를 의미하고, 서문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문은 자연을, 북문은 길조를 의미한다고 한다.

성문은 코끼리 등에 가마를 얹고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만들었다. 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 두곳 모두 넓은 해자를 건너도록 만들고 높은 성벽을 쌓음으로서 적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했을 뿐만 아니라 밀림지대에 풍부한 목재가 아니라 단단한 석재로 축성하여 당시 앙코르왕조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 원(元: 1271~1368)의 사신단 일원으로 앙코르왕조에 왔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의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2. 앙코르톰 남문과 악신(우측)
2. 앙코르톰 남문과 악신(우측)

앙코르 톰의 정문은 동문이지만, 씨엠립을 찾은 관광객들은 앙코르 와트와 프놈바켄 등 인접한 사원들과 왕래가 편리한 남문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남문으로 들어가는 해자 위의 다리 양쪽 난간에 머리가 일곱인 뱀의 신이 바수키가 조각되어 있다. 바스키는 몸은 뱀이고 무릎 위는 사람의 얼굴인데, 왼쪽 난간에는 선신(善神 =Deve), 오른쪽 난간에는 악신(惡神 =Asura)을 각각 27개씩을 조각해 놓았다.

이렇게 선신과 악신을 좌우로 배치한 것과 27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에게 악신은 앙코르 왕조를 자주 침략한 참파 왕국(Champa: 占波)으로 상징되고 있다. 지금의 베트남 중부지역에 있던 나라로서 중국에는 임읍(林邑)으로 알려진 참파는 해안에 위치하여 무역과 해적생활을 하며 중국 해안까지 침략하다가 중국의 보복으로 446년 중국에 점령되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에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번영과 예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1714년 베트남에게 멸망되었다.

2-1. 남문 해자 위 선신들(왼편)
2-1. 남문 해자 위 선신들(왼편)
2-2. 앙코르 톰 해자
2-2. 앙코르 톰 해자

 지방 호족출신으로서 1170년 툰레삽에 침공한 참파를 물리친 후 왕위에 오른 수리아바르만 7세는 반대파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서 오랫동안 믿어왔던 힌두교 대신 마하야나(대승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로서 백성들부터 추앙 받았으며, 스스로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을 내세워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구제 시설을 건설하는 등 애민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앙코르 왕조는 다시 힌두교로 환원되고 국력도 급격히 쇠퇴했다. 앙코르왕조는 앙코르 톰을 건설하기 시작한 야소바르만 1세부터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를 완성한 수리아바르만 7세 집권기까지 약200년 동안 전성기였는데, 수리아바르만 7세의 업적은 앙코르 와트의 벽면에 조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앙코르 톰 남문
3.앙코르 톰 남문

 역대 중국왕조는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진랍은 송(960~1279)의 정사인 송사(宋史) '진랍전'(眞臘傳)에도 소개되는 등 일찍부터 중국에 조공했다. 원이 대륙을 통일 후 조정에서는 만호와 패호를 진랍에 파견하였으나 이들의 소식이 두절되자, 원의 성종(1294~1307)은 1294년 6월 사신을 보내서 진랍을 굴복시키고 이듬해 2월 주달관 일행을 파견했다. 모두 20개 항목을 약8500자로 설명하고 있는 진랍풍토기는 앙코르왕조에 대하여 주달관의 이전이나 이후에도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아주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절강성 온주(溫州)의 영가현(永嘉縣) 출신인 주달관은 1296년 4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앙코르 톰에 머물렀는데, 그가 찾아온 것은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Ⅲ: 1295~1307)의 지배시기에 해당한다. 주달관은 고향 온주에서 배를 타고 동지나해를 항해하여 메콩 강을 거슬러 7월 '앙코르톰'에 도착했는데, 뱃길로 2개월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태풍을 만나 6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앙코르 톰에서 약1년을 보낸 주달관 일행은 1297년 6월 귀국길에 올라서 두달 만인 그 해 8월에 영파(寧波)항으로 돌아왔다.

3-1. 브라만 얼굴상들
3-1. 브라만 얼굴상들

 주달관은 앙코르 톰의 왕궁의 성벽․ 사원뿐 만 아니라 백성들의 거주지․ 물․ 축제․ 왕의 비빈등을 보고 느낀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도성 안에는 100만 명이상이 살고 있었으며,  왕궁은 황토색을 띤 벽돌로 지었다고 했다. 앙코르 톰에서 다른 사원과 달리 붉은 빛이 나는 피맨아카스(Phimeanakas) 사원을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궁궐의 중앙에는 황금 탑이 우뚝 솟아 있고, 주변에는 12개가 넘는 작은 탑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이 있어서 외국에서 온 사신들 모두가 놀라워했다고 한다.

국왕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하루에 두 번 황금과 보석으로 몸을 장식한 옷차림으로 궁중에 나가 국사를 처리했다. 백성들은 남녀 모두 상투를 틀고 웃옷을 벗은 채 다니고 풀로 엮은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조상을 모시는 사당은 기와지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살림살이는 토기와 국을 끓이는 냄비 같은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불교사원은 중국과 달리 범종, 법고, 징, 동발, 당번, 보개 등이 없고, 톤레삽 호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거미줄처럼 앙코르 톰 수도를 누볐으며, 특히 밀림지대에서 살고 있는 코끼리를 군사용으로 기르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열대지방인 씨엠립에서 앙코르 톰이나 앙코르와트 등 앙코르 유적 관람은 대부분 돌로 건축한 석조문화이어서 뜨거운 태양열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석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무더위가 극심한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