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43] 정치공세도 팩트가 먼저, 품격은 기본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7일 비무장지대(DMZ) 첫 남북공동 지뢰제거 작업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청와대 유튜브 영상.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7일 비무장지대(DMZ) 첫 남북공동 지뢰제거 작업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청와대 유튜브 영상.

'최근 임종석 비서실장이 선글라스를 쓰고 군사현장을 시찰하며 찍은 사진이 화젯거리다. 종종 선글라스 사진이 회자되는 것은 선글라스의 메타포(metaphor. 은유‧상징)중 하나가 권력이기 때문이라 한다. 요즘은 선글라스의 용도가 자외선 차단 외 패션의 목적으로 쓰이며 더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조석준 전 기상청장이 며칠 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단돈 2만 원 짜리 선글라스가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요즘 세상에 선글라스야 조 전 청장 말마따나 남녀노소 즐겨 착용하는 생활용품입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그 흔한 생활용품 하나도 ‘공격용’으로 쓰이나 봅니다. 하긴, 정치인 일거수일투족이 논란이나 사회적 이슈가 되는 시대니까요.

손학규(70) 바른미래당 대표가 비무장지대(DMZ)를 다녀온 임종석(52) 대통령 비서실장을 향해 ‘자기 정치’한다고 몰아세웠습니다. 대통령이 유럽 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때, 비서실장이 “국정원장, 국방부장관, 통일부장관을 부하 다루듯 대동하고” 전방부대를 시찰했다는 이유였죠.

손 대표는 덤으로 임 실장이 내레이션 한 전방 부대 시찰 동영상을 청와대 공식홈페이지에 올린 것도 나무랐습니다. “비서실장은 나서는 자리가 아니다. 자기 정치하려거든, 비서실장 자리에서 내려오시라. 국민들은 또 하나의 차지철이나 또 다른 최순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야단했지요.

맞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위치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재인 비서실장이나 박근혜 정부 시절 김기춘 비서실장이 그랬던 것처럼. 또 손 대표가 언급한 차지철(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호실장)도 ‘권부의 실세’였지요. 누구보다 행실과 처신에 조심해야 할 보직임에 틀림없습니다.

임 실장의 ‘자기 정치’ 논란에 청와대는 즉각 반박했지요. 김의겸 대변인은 “임 실장이 언제 자기 정치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상황 점검을 위해 현장을 방문한 것”이라고 해명했지요.

동영상 내레이션도 “임 실장이 주도적으로 한 게 아니라, 소통수석이 같이 화살머리 고지에 다녀온 뒤 그 내용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 아이디어를 내고 제작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그럽니다. 싸고돈다고.

제가 그날 김의겸 대변인 브리핑 자리에 있었는데요. 김 대변인이 먼저 해명한 게 아닙니다. 브리핑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 중에 나온 질문에 답한 거거든요. 임 실장과 청와대를 두둔하려는 건 아닙니다. ‘청와대 2인자’가 불필요한 오해로 입길에 오르내리는 건 저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손 대표가 겨우 2만원짜리 선글라스를 쓴 임 실장에 독설한 이유는 뭘까요. ‘젊은 친구가 오버 하는구먼’하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덕분에 ‘남북 첫 공동 유해 발굴 현장’은 그 역사적 의미가 묻히고 말았죠.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감정’이라도 있던 걸까요.

시간을 두 달 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지난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임 실장은 야당 대표들에 평양정상회담 방문을 요청했는데요. 손 대표는 “No”했지요. 그러자 임 실장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했습니다. “당리당략과 정쟁으로 어지러운 한국 정치에 꽃할배 같은 신선함으로 우리에게 오셨으면 한다.” 가뜩이나 ‘올드보이’소리를 들으며 당권을 쥔 손 대표로서는 ‘꽃할배’ 소리에 기분 좋을 리 없었겠죠.

손 대표는 당시 “꽃할배가 어쩌고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비서실장이 자기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발끈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임 실장의 ‘꽃할배’ 비유는 적절치 못했다고 봅니다. 재선 국회의원(16대, 17대) 출신이라면, 정치선배에 대한 예우와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품격을 먼저 생각했어야 합니다.

모르긴 해도 손 대표 가슴 한구석에 임 실장에 대한 앙금이 남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 임 실장 행보를 보고 ‘그래, 아주 딱 걸렸어’ 했을 겁니다. 선글라스 쓰고 놀러간 게 아닌데,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 자격으로 간 건데 말이죠.

손학규의 임종석 때리기를 ‘정치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임 실장이 문재인 정부 실세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대통령 옆에 바짝 붙어있으니까요. 나아가 차기 잠재적 대권 주자라는 것도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얘깁니다.

그러니 야당 대표 눈에는 임 실장이 ‘빛과법전(삐까뻔쩍)’ 선글라스 끼고 군 통수권자라도 되는 양 지휘관을 대동하고 전방을 활보하는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손 대표가 차올린 공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받았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청와대 왕실장 정치를 이제 본격화했다”, “임종석 실장은 DMZ 상에서 맥아더 선글라스 끼고 그런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자중하라”고 일침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손 대표와 김 원내대표 워딩을 또 다시 ‘정치적으로’ 보면요. 두 사람이 임 실장을 정말 차기 대권주자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혹시, 임 실장이 두렵고 무서운 걸까요?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있다고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콕 박혀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설령 전방 시찰 도중 안보 위기라도 벌어지면, 그 자리에서 지휘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요? 엉겁결에 소환된 차지철과 최순실, 맥아더는 또 무슨 잘못입니까. 왜 ‘팩트 폭행’이란 말이 있죠. 여기선 ‘폭행’보다 ‘팩트’가 선(先)입니다.

보수야당이 위기라고 합니다. 지난 8월 한국당이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에 의뢰한 용역 결과가 나왔는데요. '한국 보수정당의 위기와 재건'이라는 보고서입니다.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최근 3년간 치러진 전국단위 선거 3연패(20대 총선, 19대 대선, 6.13지방선거) 원인을 “경직된 대북·안보정책”으로 지목했습니다.

‘권위주의와 집단주의가 한국당을 점령해 이념적으로 중도에 위치한 고전적 자유 중시 보수주의자들이 이탈한 결과’가 선거 참패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보고서는 그러면서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존한 낡은 대북·안보 프레임을 버려야 한다"는 정책 제언을 내놨습니다.

3연패 이후에도 보수 야당 지지율은 여전히 오를 기미가 안 보입니다. 여전히 문 대통령과 청와대에 끌려가는 양상입니다. ‘대통합론’ 군불은 연신 지피고 있지만, 풍비박산 난 집안을 일으키려면 ‘보수의 품격’을 회복하는 게 먼저입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청와대에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 앞서 임 실장을 만났죠. 관련 기사를 보니 ‘미국도 실세를 알아보는 것이냐’는 댓글이 여럿 보이더군요. 이런 댓글은 누가 다는 걸까요. 물론, 임 실장은 ‘용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꿈이 깨지더라도, 민주당에는 그만한 ‘잠룡들’이 차고 넘칩니다. 임 실장이 속으로 이런 댓글을 올리진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너나 잘하세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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