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캄보디아 지도
1. 캄보디아 지도

캄보디아의 제3의 도시인 씨엠립은 9세기부터 14세시까지 630년 동안 동남아에서 대제국을 형성했던 앙코르 왕조의 도읍지로서 곳곳에 앙코르 왕조의 유적이 많다, 캄보디아는 중국 역사서를 통해서 1세기경 부남국(扶南國)으로 처음 알려졌는데, ‘부남’이란 크메르어로 산(山)이란 의미의 '푸난'(Pnom)을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부남국은 오늘날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남아시아 최초의 힌두교왕국으로서 해상교역을 하며 인도에서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3~ 6세기에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보내기도 했다. 부남국은 6세기경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에게 병합되었는데, 부남국과 진랍에 대한 기록은 중국 원의 성종(1265~ 1307)때이던 1296년 4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조공을 받으러 진랍에 사신으로 왔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1. 캄보디아 국기의 앙코르와트.jpg
1-1. 캄보디아 국기의 앙코르와트.jpg

진랍이 곧 앙코르왕조인데 앙코르왕조는 802년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Ⅱ: 802~850)가 프놈 쿨렌(Phnom Kulen)에 도읍을 정한 후 1432년까지 630여 년 동안 28명의 임금이 다스렸는데, 앙코르(Ankor)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나라 혹은 도읍’을 뜻하는 나가라(Nagara: 뱀이나 용이 사는 곳)가 변한 것이다. 도읍지 푸놈 클렌이 오늘날 인구 25만 명이 살고 있는 씨엠립이다.

2. 앙코르와트 입구
2. 앙코르와트 입구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6.5km쯤 떨어진 곳에 앙코르왕조의 전성기이던 수리아바르만 2세(Suryavarman II: 1113~1145)가 세운 사원 앙코르와트(Angkor Watt)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1.5km 떨어진 곳에 앙코르왕조의 도읍지 앙코르 톰(Ankor Thom)이 있다. 앙코르 와트는 동서 1.5㎞, 남북 1.3㎞의 거대한 직사각형 사원으로서 사원의 서쪽에 폭 190m의 거대한 해자를 건너 경내로 들어가고, 앙코르톰은 가로 3km, 세로 4km의 사각형 도시에 인구 100만 명이 살았는데, 두 곳 모두 넓은 해자를 건너도록 조성되어서 적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했으며 밀림지대에 풍부한 목재가 아니라 단단한 석재로 조성한 것이 앙코르왕조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수리아바르만 2세는 1113년 힌두교의 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신격화 수단으로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면서 이곳에서 약40km 떨어진 프놈 끌렌 산의 바위를 깨뜨려서 코끼리로 석재를 운반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원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인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25~1218)가 착공한지 37년 만에 완성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30년 동안 통치하면서 앙코르왕조의 세력을 최대로 확장시켜 현재의 캄보디아 · 라오스 · 타이 ·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으나, 이후 급격하게 국력이 쇠약해져 1431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에게 멸망했다. 태국에서는 앙코르 와트를 ‘노코르 바트(Nokhor Vat)'라고 부르고, 방콕의 왕궁사원 안에 앙코르 와트 사원을 축소한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2018.09.10. 태국 왕궁사원 참조).

3. 앙코르와트 경내
3. 앙코르와트 경내
3-1. 사원 전경
3-1. 사원 전경

 앙코르왕조의 멸망과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앙코르와트는 1861년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의 식물학자 헨리 모하트(Alexandre Henri Mouhot: 1826~1861)가 정글을 탐험하다가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앙코르와트의 존재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힌두교사원이 동쪽을 향해 세워진 것과 달리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죽음의 사원'이라 하여 두려워하며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리 모하트는 앙코르와트가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 더 위대하다고 찬양했는데, 그는 이듬해 라오스를 여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35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후 많은 프랑스인들은 거대하고 신비로운 앙코르와트를 평생에 두 번은 방문해야만 지성인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정식 명칭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앙코르의 사원’이라며 편의적으로 붙인 것이다.

오늘날 앙코르와트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1992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앙코르와트가 국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화폐 ‘리엘 ’에도 들어있다. 또, 캄보디아의 맥주 ‘앙코르 비어’도 캄보디아인들의 자부심이다.

씨엠립에서는 유적지마다 개별적인 입장권을 팔다가 최근 시내의 모든 유적지 관람에 통합입장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즉 어느 관광지이건 입구에서 관광객의 얼굴을 촬영한 뒤 사진이 첨부된 ID카드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는데, 사진의 해상도는 가히 코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것은 관리위탁을 받은 일본인회사에서 수입을 늘이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로서 결국 캄보디아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은 일정 비율의 이익금만 지불하고 수익금 대부분은 일본이 가져가는 구조이다.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의 복원공사도 대부분 일본인회사들이 맡아 공사하고 있다. 2017년 2월 1일부터 1일권 20달러를 37달러, 3일권 40달러를 62달러, 7일권 60달러를 72달러로 대폭 인상했다. 
 

4. 제1 회랑입구
4. 제1 회랑입구
4-1. 회랑벽화
4-1. 회랑벽화

앙코르와트는 서쪽에 폭 190m의 해자를 건너서 경내로 들어가는데 해자 위에는 너비 9.5m, 길이 475m의 돌다리가 있다. 사원을 둘러싼 해자는 바다를 의미하며, 돌다리의 오른편 절반가량은 복구되었지만 절반가량은 무너져 보수를 기다리고 있다. 외부에서는 3개의 첨탑 밖에 보이지 않지만, 넓은 잔디밭 광장을 지나 사원의 제1회랑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회랑건물이 사원을 한 바퀴 에워싼 내부에 마당이 있고, 그 마당 안쪽에 다시 제1기단의 회랑건물보다 작은 두 번째 회랑건물이 한 바퀴 에워싸고 그 안에 다시 작은 회랑건물이 세 번째 에워싼 중앙에 높은 석탑건물이 있다. 제1회랑(215×187m)의 높이는 4m, 제2회랑(115×100m)은 12m, 제3회랑(60×60m) 25m인데,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5. 중앙탑
5. 중앙탑

 앙코르와트의 석재의 질은 그다지 좋지 않은데, 첫 번째 기단에는 아름다운 벽화를 새기고, 목욕탕 등을 만들었다. 양각한 벽화는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인도의 전통신앙인 힌두교 전설인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신과 악마의 전쟁, 그리고 앙코르와트를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의 전쟁 출정 이야기를 회랑을 따라 길게 새겼다.

특히 동쪽 1층 회랑에 등장하는 부조물들은 힌두교의 창세신화인 인도의 전설 ‘샤타파타프라나’의 세계 창조신화를 새긴 벽화인데, 선신과 악신들이 큰 뱀인 비수키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각각 잡고, 젖의 바다를 휘저어서 불노불사의 영생인 명약 암리타와 미의 여신 락슈미 그리고 천녀 압사라(Apsara) 등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은하수를 설명하며,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무지개를 의미한다. 앙코르 유적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늘의 무용수’ 압사라들이 춤추는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UNESCO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앙코르와트 부조에 새겨진 압사라는 모두 1700개나 되지만 손짓 발짓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제3회랑은 가장 높은 불교의 정상인 수미산으로서 모서리에 높이 65m의 탑이 각각 1개씩, 가운데에 가장 높은 탑 1개가 있다. 수미산은 경사도 70도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은 힌두교의 계급제도와 인도 부다가야 5탑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 내전 중이던 1972년 낮에는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 루지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모두 약탈되었으며 사원은 파괴되어 완전복구는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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