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86]
탈북자 [86]
  • 이광희
  • 승인 2018.10.29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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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내실로 통하는 복도를 유심히 관찰한 뒤 화장실 쪽으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사내가 내 앞에 불쑥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바람처럼 다가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첫 번째 룸 뒤에 숨어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사내는 화장실 속에서 물수건을 빠는 모양이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질척거렸다. 그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콧노래와 휘파람을 섞어 부르곤 했다.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큼 흥얼거리는 그 소리 때문에 쉽게 그가 있는 화장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흥얼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손에는 카운터를 닦기 위한 물수건이 들려 있었고 흰 와이셔츠는 팔목까지 걷혀 올라가 있었다. 사내는 금단추가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실 끝에 매달린 단추가 유독 튀어 보였다. 그가 내 눈 앞으로 다가오자 메케한 싸구려 향수냄새가 지하실의 눅눅한 냄새와 뒤섞여 나를 구역질나게 했다. 나는 속으로 하나, 둘을 센 뒤 셋과 동시에 호흡을 멈추고 흑표범이 먹이를 낚기 위해 나무 위에서 몸을 날리듯 기민하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는 그의 입을 막고 다른 손에 쥔 권총의 총구를 그의 관자놀이에 들이댔다.

그는 갑작스런 나의 공격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순식간에 화석처럼 굳은 채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렸다. 그는 한동안 두 다리를 쭉 뻗고 내게 몸을 기댄 채 멀뚱하게 서 있었다. 정신을 잠시 잃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총구가 자신의 머리 한가운데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카운터와 홀 사이에 난 복도를 따라 들어간 뒤 곁눈으로 주변을 힐끗거리며 가장 구석진 방으로 끌고 갔다.

룸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마련된 것으로 미루어 특실쯤으로 보였다. 탁자 위에는 천장에서 줄을 타고내린 전등이 부딪혀 흔들렸다. 나무 판제를 잘라 만든 룸은 문만 닫으면 안에서 어떤 소란을 피워도 밖으로 그 소리가 세어나갈 것 같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를 테이블 건너편에 앉힌 뒤 가슴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그때까지 사내는 내가 금품을 털기 위해 들어온 강도쯤으로 생각했거나 혹은 마피아 흉내를 내는 철없는 사내쯤으로 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놀라 떨었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지켜보며 여유를 부렸다.

특히 내가 담배를 빼물자 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빈정거렸다.

자신들의 악명을 들어보지도 못한 애송이가 들어와 흉내 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눈치였다.

당신 누구야?”

나는 말없이 안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채린의 사진을 그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그때까지 그는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로 내 행동을 지켜봤다. 그러다 내가 내민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갑자기 긴장된 모습으로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나를 충분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처음 본 그가 나를 안다는 것은 반갑다기보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이들이 세르게이의 충고처럼 나를 추적하거나 나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고 복수를 손꼽고 있다는 징조였다. 기분이 언짢았다. 그자보다 도리어 내가 더욱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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