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한낮에는 아직 잔서가 남아 있지만 조석으로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북회귀선을 돌던 태양이 적도 쪽으로 많이 내려갔음이리라. 지축 삐뚤어진 지구가 쉬지 않고 공전을 했음이리라.

이 때쯤이면 볼 붉은 대추를 보지 않아도, 노랗게 물드는 감을 보지 않아도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엊그제 내린 비에 떨어진 벚나무 노란 잎들에도 가을이 묻어 있고,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에도 가을이 묻어난다. 

도로변 가로수 밑에 힘겹게 자란 키 작은 강아지풀들이 가녀린 목을 수그리고 있는 모습에도 가을을 느낄 수가 있다. 

지난여름의 불볕더위에 지치고 끈적끈적한 열대야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이제 살맛이 난다.”고들 말한다. 한낮의 햇볕이 비록 따갑기는 하지만 지난여름의 유별난 더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리라. 예나 지금이나 가을은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지만 결실의 계절로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도 하고, 책읽기 좋은 계절이라고도 한다. 책을 읽음에 꼭 계절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가을은 봄철의 나른함도, 여름날의 후텁지근함도, 겨울날의 추위도 없기 때문에 책 읽기 좋은 계절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다. 책 읽음의 유익함을 표현한 말들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유별나게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새 책과 헌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다. 아니 요즘은 새 책 보다 헌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지금은 헌책점도 새 책을 파는 서점처럼 서가를 갖추고 도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팔기도 하지만, 중앙시장 헌책방-지금은 예전처럼 많지 않고 몇 곳만 남아있어 아쉽다-을 즐겨 찾는다. 얼핏 보면 산더미 같이 책들을 마구잡이로 쌓아 놓는 것 같은데 “아무개의 무슨 책 있나요?”하고 물으면 책방주인은 곧바로 ‘있고 없음’을 알려 준다. 참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헌책을 찾는 이유는 현직 때처럼 금전적인 여유가 덜함을 굳이 부인하지 않지만, 전에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지금은 절판이 돼서 나오지 않는 책들도 있다-을 싼 값으로 구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종이가 누렇게 변하고 세로로 인쇄된 아주 오래된 책도 있지만, 때로는 새 책처럼 아주 깨끗한 책도 구할 수가 있다. 어느 책은 10여년이 채 안 된 책도 있고, 어떤 책은 30-40년이 훌쩍 지난 책도 있다. 

저자가 생존한 경우도 있고 고인이 된 경우도 있다. 기왕이면 헌책이라도 깨끗하고 정갈한 책을 구하지만, 어느 때는 재고가 없어 좀 지저분한 책을 살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헌책을 읽다 보면 부수적으로 느끼는 재미가 있다. 정갈한 책은 책갈피를 끼며 읽었는지 접힌 곳 한 곳 없이 깨끗한데 비해 좀 지저분한 책은 볼펜으로 밑줄을 치거나, 여기저기 형광펜으로 그어 놓은 곳도 있다. 또 어떤 책은 노안이 돼서 읽기가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마지못해 읽었는지 2.30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접어놓은 경우도 있다. 책 맨 뒤에 완독했다는 표시로 날짜를 쓰고 완(完)자를 써 놓은 경우도 있다. 

이처럼 헌책을 읽다 보면 성격들이 각양각색인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또한 헌책 읽는 재미의 하나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음이다. 주로 읽는 책은 (역사)소설류나 수필이지만, 헌책방 간 날 눈에 띄는 책을 선택해 읽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6.25 한국 전쟁의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2010·∽2011 출간 전3권)’는 책이 있기에 즉석에서 구입했는데 가격이 출간 당시의 절반 값도 안 됐다. 29세에 1군사령관으로서 다부동전투를 치르고, 인천상륙 작전 후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등 전투 때 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32세에 육군참모총장이 돼 한국전을 이끈 백장군의 활약상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또 6.25 한국전 당시의 가난했던 조국의 현실을 수록된 사진들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헌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새 책을 읽는 경우는 책 내용이 궁금한 경우와 시기적으로 읽을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때이다. 예컨대 탈북 외교관인 전 주영공사 태영호 씨가 지은 ‘삼층 서기실의 암호’나, 국무총리를 지낸 JP가 작고하면서 남긴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같은 책은 출간이 되자마자 구해서 읽었다. 이런 책들이 헌책방을 나돌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한 경우는 드물지만 지인이 책을 냈음을 알려올 때이다. 

엊그제 지방 일간신문 펀집국장을 끝으로 신문사를 떠난 전직 언론인 한 분이 동생분과 함께 전국 3000km를 돌아보고 ‘기자형제 신문 밖으로 떠나다’라는 책을 냈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 번은 모처럼 헌책방 대신 신간서적점을 들려야겠다. 마침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기도 하지 않은가. 주제 넘는 말인지 모르지만 이 가을에 헌책이든 새 책이든 한 두 권이라도 손에 쥐고 책 읽는 재미를 느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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