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철새를 탐조하는 사람들은 위장복을 입고 나무와 풀 사이에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을 움직이지 않고 나무와 하나가 된다. 그래야 철새들이 의심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장술을 써야한다. 새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을 충분히 인내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희귀 새를 촬영하는 기자들을 그런 기다림 없이 마구 카메라를 들이댄다. 당연 철새들은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어떤 차이일까? 그 행동이 서로 옳다 틀리다가 아닌 다름이란 걸 알 수 있다. 결국 사고의 관점이다.

철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사전준비와 꼭 관찰해야겠다는 설렘으로 맞이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취재기자는 철새들의 대한 배려보다는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의 다름이다.
 
영화 ‘신과 함께(1)’ 에 감동하여 연속 두 번을 보았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과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영화의 시작은 이랬다. “저승 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쳐야만 한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 어떻게 표현했을까하는 호기심이 가득하였다. 영화를 함께 보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 염라대왕마저 심판을 할 때 결과적인 부분만을 보고 심판하려 하자, 변호인이 나서서 변론을 하면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어쩌면 이처럼 억울하고 또는 오해를 받고 해명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억울한 채 그대로 묻어두어야만 하는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맞이해 본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다를 뿐이다.’ 라고 말한다.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듯이, 그것은 무언가를 결정짓듯 틀림이 아닌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7번의 재판은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고 결정을 하느냐에 따른 또 다른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명대사로 "지나간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마세요“ 란 대사가 여러 번 울림으로 남는다. 의미해석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직되는 부분이 다르다. 자신과 받아드림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틀렸다’ 라고 하진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실수를 해왔다. 수학문제를 풀 듯 이것은 틀린거야. 처럼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우리의 삶. 그 속에서 우리는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면서 좀 더 포용력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법륜 스님은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 란 분별의 관점에서 우리는 늘 시시비비에 끌려 다니고, 자꾸 경계를 지어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고 억울함을 밝힐 때는 모든 시비분별을 내려놓고 더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다름에 대해서 지지하고 공감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충분한 도움과 변화의 계기를 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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