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

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이제 지공거사가 되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얼마간은 자조 섞인 표현대로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전혀 의식 않고 지내다가 얼마 전 친구와 같이 지하철을 타는 바람에 어느새 나도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경로우대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 지하철 토큰을 사려 지갑을 꺼내다가 친구의 귀띔에 지갑을 도로 챙겨 넣고는, 자동매표기의 어딘가에 주민등록증을 올려놓으니 토큰이 그냥 나왔다. 그 토큰을 집어 들고 개찰구를 통과하자니 공연히 겸연쩍고 기분이 아주 묘해졌다. 갑자기 확 늙어버린 것 같은, 까닭 없이 서글퍼지는, 그러면서 왠지 점잔을 빼야 될 것 같은........ 하여튼 뭔가 거북스럽고 편치 않은 느낌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참으로 복잡하게도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며 현재의 나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하기는 요즘 또래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 가면 으레 누군가가 병원에 다녀온 얘기를 꺼내고, 그런 얘기 뒤끝으로는 모두들 몸이 작년 같지 않다느니, 전에는 힘든 줄 모르고 가볍게 해치우던 일도 기력이 딸려 못하겠느니 하며 노인 행세를 하는 분위기이기는 하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어딘가 불편한 곳을 얘기하면서 덩달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맞장구를 치기 일쑤다. 그러나 사실은 늙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고, 아직은 팔팔한 기분으로 지내왔다. 그런데 얼떨결에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나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간다. 알고 보니 지하철 요금만이 아니라 어느 관광지에서건 꼬박꼬박 내던 문화재관람료나 입장료가 면제되질 않나, 가끔씩 보러 가는 영화 관람료가 할인이 되질 않나, 심지어는 기차요금까지 경로우대 명목으로 할인이 되니 얼떨결에 꼼짝없는 노인이 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우리 나이가 공공연히 노인취급을 당하는 나이임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된 것은 지하철에 나붙은 여러 병원들의 이러저러한 임상실험대상자 모집 광고를 보고나서 부터다. 어느 경우에나 만 65세 미만의 사람들로 한정해서 임상실험 대상을 모집하고 있는 이러저러한 광고문을 보고 나니, 이제 임상실험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영락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노인 취급받고 있음을 마지못해, 어정쩡하게 깨달아 가다가 결정적으로 공인된 노인임을 재확인하게 된 것은 보건소에서 보내 온 예방주사 안내문을 받고 나서다. 작년까지 없던 예방주사 안내문을 받고 보니, 결국은 ‘이제 당신은 노인이 되었으니 국가에서 특별히 건강을 챙겨주겠노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면서 갑자기 내가 폭삭 늙은 것으로 여겨지는 거였다.

그 까짓 것들이 뭔 대순가 싶어 의식 않고 종전처럼 지내리라 하면서도, 막상 요즘 들어서의 내 생각이나 행동거지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내 스스로의 건강과 기력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이제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정부에서 공인한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무엇보다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다. 전에는 다소 불편한 곳이 생겨도 곧 낫겠지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냈는데, 이제는 혹시 큰 병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옛날 같지 않게 불안해진다. 그러다보니 뜸하게 지내던 의사 친구들에게 새삼스럽게 전화를 걸어대며 자문을 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또 최근 들어 예전보다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날이 갈수록 운전이 부담스럽고, 귀찮게 여겨지기도 하거니와, 지하철이 닿는 곳이라면 무료로 다녀 올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이 더해져 어지간하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다만 얼마라도 돈을 내가며 지하철을 타던 때에는 돈을 조금 더 내고 편하게 택시를 타겠다는 생각으로 종종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특별히 급한 상황이 아니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일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하철에 오르면 비어있는 경로석에 거리낌 없이 앉아 버리는 점도 예전에 비해 달라진 모습이다. 전에는 다른 좌석이 꽉 찬 상태에서 설령 경로석에 빈자리가 있더라도 앉기가 민망해 그냥 서서 갔는데, 이제는 서슴없이 앉아 버리는 것이다. 어느 결에 이제 그 자리에 앉아도 될 만한 나이가 되었음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해서인가? 갈수록 여기저기 불편한 곳이 자꾸 생겨난다. 아마도 마음 따라 몸도 쇠해지는 모양이다. 어디가 불편해 지면 전보다 더 불안해 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예전처럼 병원으로 쪼르르 달려가기보다는 오히려 그냥 버텨보는 경우가 많다. 그 동안 많이 써먹었으니 다소 불편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싶어 아주 심하지 않으면 그냥 버티며 경과를 보는 것이다.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셈이다.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얼핏 나이를 생각하면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싶은 것이 맥이 풀리고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면에서 여유로워져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에는 노심초사하며 애면글면하던 문제들도 이제는 뭐 아등바등할 필요가 있나 싶어 한 발 물러서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며 수월하게 넘겨버리기도 한다. 또 오롯이 나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선뜻 나서서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이 들어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사회적 책무가 덜어지다 보니 내 시간이 한결 많아진 덕분이다. 심지어는 일과 중에 불쑥 나서서 혼자 먼 길 행보로 어디 수목원을 다녀오기도 하고, 때로는 풍치가 좋은 명소를 찾아 거닐다 오는 여유를 부려보기도 한다. 그런 여유를 부릴 때면 나이 먹는다는 것이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전보다는 건강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술자리도 가급적 줄이고, 음식도 가려먹어 보려 하고, 틈나는 대로 걷고, 먹는 양도 줄이는 등 나름대로 건강을 챙기려 애를 쓰는 중이다. 아직은 일을 하고 있는 처지에서 건강에 좋다는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더 나이 들어서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그저 꾸준하게 건강을 관리해 나가는 수밖에......

여하튼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일인데 유난을 떨며 나이 먹은 행세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은이 행세를 하는 것도 눈꼴사나운 일이다. 그저 부산떨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렇지만 스스로 즐겨 가면서 나이를 먹어 가고 싶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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