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밤꽃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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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떴을 때 조잡한 무늬가 불규칙적으로 그려진 천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널찍한 방 한편에 놓인 딱딱한 침대에 내가 반듯이 누워있었다.

겨울나무 같은 알몸에는 여자의 실크 잠옷이 걸쳐 있었고 그것에서 배어나는 라일락꽃 향기가 나를 유쾌하게 했다.

피로 뒤범벅이 됐던 손은 기름때 묻은 것처럼 손톱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깨끗이 닦였으며 흙투성이가 됐던 바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딱딱한 침대에 꽁꽁 묶인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등짝에 침대가 붙어버린 것 같았다. 고개도 돌릴 수가 없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호흡을 들이킬 때마다 옆구리에 쐬기가 박힌 것처럼 결렸다.

이마에 붙은 하얀 거즈 뭉치만이 눈앞에 희미하게 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혓바닥을 움직였다. 거북스러웠다. 입안 곳곳이 헤어져 혀끝에 너덜거렸고 따끔한 통증이 움직이는 혓바닥을 따라 신경을 건드렸다. 얼굴은 볼품없이 소다를 과다하게 넣고 찐 빵같이 부풀어 있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터질 것 같은 욕망을 활화산같이 분출시키고 난 뒤의 허무함이 들었다. 몽정을 한 것처럼 사타구니가 끈적거렸고 골수에서 진액이 빠진 것같이 다리가 힘없이 허물 거렸다. 침대 난간 대에는 핑크빛 잠옷이 아무렇게나 걸려있었다. 밤꽃 냄새가 라일락 향기와 뒤섞였다.

나는 늘어진 몸을 추스르고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발바닥의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예민하게 다가왔다. 나는 방 가운데 놓인 황갈색의 색 바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이곳이 누구의 집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냐의 집이었다. 화장품 냄새가 짙게 풍기는 잠옷과 해묵었으면서도 화사한 그림자가 그대로 살아있는 거울, 검소한 생활에 잘 길들여진 아늑한 공간, 이것들이 따냐의 방임을 말해주었다. 그녀의 방은 원 룸 형태의 구조였다.

연분홍빛 커튼이 조용히 드리워진 창가에는 손때 묻은 탁자와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파란 들꽃이 화분에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서녘으로 기우는 햇살이 스며드는 남쪽 창가에는 낡았지만 깨끗한 침대가 한가로이 놓여 있었다. 세간이 잘 정돈된 주방과 변색된 가족사진이 걸린 식탁, 앙증맞으면서도 신선한 향기가 묻어있는 욕실, 그녀가 지식을 파며 몸살을 앓았을 책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발코니와 작은 현관문, 그림 걸기가 거의 불가능한 매우 견고한 콘크리트 벽…….

따냐 혼자 생활하기에는 꼭 맞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공간이 비좁아 다소 옹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혼자 있고 싶은 시간에 숨을 죽이고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따냐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알몸을 가릴 심산으로 집 안을 뒤져 내 옷을 찾았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부끄러움이 살포시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옷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화사한 거울 속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멀뚱멀뚱 내다봤다. 거울 속의 그 사내는 오쟁이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사타구니에 휴지조각을 붙이고 서 있었다. 얼굴은 전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뭉그러졌다. 헝클어진 머리칼만큼이나 머릿속이 어지러울 것 같아 보였다. 알맹이를 잃은 빈껍데기의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입을 굳게 다물고 맥이 풀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별안간 현기증이 머릿속을 꽉 조였다. 가슴 속에서는 걸쭉한 역겨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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