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도 생기를 잃을만큼 찌는듯한 여름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밥상 차려놓으니 신문을 본다는 아내의 불평이 이어졌고, 딸아이가 늘어놓는 담임선생에 대한 험담도 들었다. 이야기 도중 흥분한 아이가 "우리 담임 너무 이상하지 않냐"고 동의를 구할 때 맞장구를 쳐주었고 가방을 드는 순간에 맞춰 엘리베이터를 잡아줬다.

 그가 그 전화를 받은 것은 한밭도서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침 아홉시, 4층 열람실에 앉아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꾸려는 찰라 벨이 울렸다. 요란한 벨소리는 오래된 성채처럼 버티고 있던 고요를 깨뜨렸고 칸막이 곳곳에 숨어 있던 고개를 밀어 올렸다. 그는 기지개를 켜다 날카로운 가구모서리에 손등을 찢긴 것 처럼 아차 싶었다. 급히 소리를 줄이며 화면을 들여다보니 요양병원이란 글자가 떠 있었다. 순간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의사와 통화를 끝내고 그는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직장에 출근한 아내에게 사실을 알린 뒤 군에 있는 아들의 중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사출신인 중대장은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바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10분쯤 지나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괜찮으세요? 아들은 울고 있었다. 그는 마땅한 대답을 찾기 어려워 침묵했다. 그 사이에도 아들은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였다. 할머니, 고생만 하셨는데.... 그의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아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착하려면 세시간쯤 걸릴 거예요. 그래,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와라. 전화를 끊자 얼었던 수도관이 터지듯 눈물이 나왔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생각했다. 신은 공평하지 않으며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합리화를 위한 언어유희일 뿐이라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그것이 있다. 그가 어머니를 생각 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집으로 오는 길에 고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가 보였다. 편도 이차선의 좁은 도로에서 키작은 여자가 철봉에 매달리듯 힘겹게 리어카를 끌며 지나갔다. 저기 좀 봐! 여자가 저런 일도 한다. 함께 있던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는 창피함에 어머니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자신을 본것 같았지만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지 않길 바랬다.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졌지만 집에 돌아 온 그는 곧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물장사를 힘들어 했다. 시원찮은 벌이, 직업에 대한 냉대, 동료들의 경쟁 의식이 어머니를 괴롭혔지만 어머니는 남자도 하기 힘든 고물장사를 멈추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그는 어머니에게 돈을 타내기 위해 습관처럼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 같았다. 받아낸 책값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메이커 옷을 샀다. 그 사이에도 만취한 그의 아버지는 동네 가로등을 걷어차며 비키라고 소리쳤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담장 밑에 있는 잡초도,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도둑고양이도, 그의 키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사사롭거나, 잊어선 안될 일들이 수없이 많이 지나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장면만은 그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았다.

 장례를 치루며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부신 땡볕아래에서 고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에서 영상이 멈췄다. 성인이 된 그는 한번도 그 리어카를 밀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비록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시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같이 아프고, 힘들고, 좋아하는 것은 같이 좋아 할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쉬지 않고 리어카를 끌었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밤, 그는 어머니의 리어카를 밀어 드리기로 결심했다. 눈을 감았다. 여름볕이 따갑던 오래전 그 날, 눈 앞에 고물을 가득 실은 어머니의 리어카가 보인다. 그는 책가방을 단단히 둘러메고 어머니의 리어카 뒤로 들어간다. 그리고 힘껏 리어카를 민다. 갑자기 가벼움을 느낀 어머니가 뒤를 돌아 보지만 쌓여있는 고물 때문에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뭔가를 깨달은 어머니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태양은 어느새 산 뒤로 넘어가며 황금빛을 만들고 고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는 언덕을 올라간다. 앞에는 키작은 여자가 끌고 뒤에는 가방을 둘러맨 중학생 아이가 밀고 있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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