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바딘광장

하노이 바딘광장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1000년 이상 역대 왕조의 수도였다. BC 257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건국되었지만, 베트남은 BC 111년경 중국 전한(前漢)에 복속된 이래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약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당은 이곳을 안남(安南)이라고 부르고,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968년 딘보린(丁部領; 정보령)이 하노이에서 베트남 왕국을 수립한 후 하노이는 이조(李朝)→ 진조(陳朝)→ 여조(黎朝) 등 역대 베트남 왕조의 수도였다. 1635년 원조(阮朝; 응우엔)때 베트남 중부인 다낭 부근의 후에(Hue; 順化)를 왕도로 삼기도 했지만, 1802년 응우옌 왕조의 자롱제가 하노이로 천도하면서 새 수도의 이름을 탕롱(Thăng Long, 승룡(昇龍))으로 고치고, 지금의 정치 1번지 바딘 구역은 대월국의 황성이 되었다.

1831년 수도 이름을 하노이(Hà Nội, 하내(河内))로 변경했다. 2017년 말 현재 인구 9000만 명의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은 1950년 이후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데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대단한데, 메콩 강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쌀은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대 쌀 생산국이다. 커피는 브라질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생산국이고, 1980년대 중반 이후 개방정책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호치민 묘소 가는길
호치민 묘소 가는길

 오늘날 하노이에서 가장 중심지는 ‘바딘 광장’이다. 바딘 광장은 2차 대전 때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인 1945년 9월 2일 독립운동가 호치민이 독립선언을 한 곳으로서 ‘9.2광장’이라고도 한다. 매년 9월 2일 독립기념일에는 이곳에서 경축행사를 벌이는데, 바딘 광장 사방으로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관공서를 비롯하여 외국대사관 등이 밀집해 있다. 그러나 광장 북쪽에는 있는 호치민(胡志明; Hồ Chí Minh; 1890~ 1969)의 묘소가 가장 인기가 있다.

호치민 묘
호치민 묘

 호치민의 묘는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모스크바의 레닌 묘를 본떠서 짙은 갈색 대리석으로 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에 검은 대리석으로 기단을 깔고, 20개의 주홍색 대리석 기둥을 세운 연꽃 모양의 건물인데, 입구에는 네 명의 군인이 밀랍 인형처럼 고정자세로 경계하고 있다. 묘소는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반바지 차림으로 입장할 수 없고, 전방 200미터 지점에 있는 물품보관소에 소지한 물건을 맡기고 줄을 지어 입장해야 한다. 묘소 안에서도 일체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없다는 까다로운 제약도 있다. 

호치민
호치민

원래 이름이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阮生恭: 완생공)인 호치민을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 Uncle Ho/伯胡: 박호)’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호찌민이란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는 화려한 장례식으로 낭비하지 말고 화장하여 재를 3등분하여 북부, 중부, 남부에 골고루 뿌려줄 것을 유언하였지만,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거대한 유리상자 안에 전시하고 있다.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전시하는 것은 구소련의 레닌,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당 지도자들의 매장방식이라고 한다. 

호치민박물관
호치민박물관

호치민의 묘소 건물 뒤편에는 베트남전쟁 당시 호치민의 집무실과 집기들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프랑스 지배 당시 프랑스총독의 관저였던 노란 색 3층 건물은 베트남 독립이후 대통령궁이 되었지만, 호치민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 옆의 프랑스인 전기수리공이 살았던 작은 집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호치민이 거주했던 관저에는 호치민이 타고 다니던 3대의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고, 집무실에는 작은 식탁과 의자 몇 개가 놓인 것이 전부일 정도로 검소하다. 이곳에서 호치민은 회의와 식사, 차를 마셨으며, 2층은 침실이 있다. 

주석 관사
주석 관사

 185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선교사 박해사건을 구실로 다낭을 공격하더니, 1884년에는 베트남 전체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베트남의 중부 응에안 성에서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치민은 관리를 양성하는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다가 반프랑스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 1912년 22살의 호치민은 선박의 요리사 보조로 일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허드렛일을 하다가 1917년 다시 식민지 본국인 프랑스 파리로 갔다.

호치민은 그 해 발생한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고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는데, 그는 파리에서 베트남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려고 했으나,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의 이준을 대표로 한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일주사
일주사

 그렇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크게 유명해졌으며,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사회주의국가 소련에 큰 호의를 갖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한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동맹(통칭; 비엣민)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나 연합국의 일원이던 프랑스가 또다시 식민지배권을 찾으려고 군대를 파견하자 베트남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을 벌였다.

이때 호치민은 북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총리(1946- 1955)와 대통령(1955~1969)이 되어 프랑스와 싸웠다. 마침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로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어 80년에 걸친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1964년부터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다시 남북전쟁이 벌어졌다. 이 내전에는 미국을 비롯한 한국․필리핀 등이 참전했지만, 결국 1976년 4월 30일 북베트남이 승리했다.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79세로 죽었는데, 남부 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따서 호치민시로 개칭되었다.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

 호치민 묘소 바로 옆에는 하노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일주사(一柱寺)가 있다. 1049년 창건되어 베트남 국보 1호인 일주사는 하나의 기둥위에 지은 절이라는 의미인데, 작은 호수 위에 정자처럼 생긴 건물하나뿐인 일주사에는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동남아의 사찰들은 우리의 전통사찰처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문, 대웅전과 같은 가람배치에 따른 사찰이 아닌데, 베트남전쟁 때 파괴되었지만 다시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베트남의 이씨(李)왕조 태종이 자식이 없어 불공을 드리자, 꿈속에 연못의 연꽃 위에서 아기를 안은 관음보살을 본 뒤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자리에 일주사를 세웠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그 전설을 믿고 전국 각지에서 이곳에 와서 자식을 낳기를 기도하는데, 참배 후 연못을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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