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후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소상공인 보호와 저소득층 소득 인상 등 보완책 마련을 제시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후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소상공인 보호와 저소득층 소득 인상 등 보완책 마련을 제시했다. 청와대 제공.

남한과 북한은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인 데도 먹고사는 문제가 천양지차로 벌어진 이유는 서로 다른 정치에 있다. 경제의 근본은 정치에 있다. 북한처럼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은 정치에선 북한과 달랐기 때문이다. 흑묘백묘론을 내세운 등소평 같은 정치인이 없었다면 중국의 성공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여당 대표는 삼성이 20조를 풀면 200만 명이 1000만원씩 혜택을 본다고 했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걸 해야 하는 쪽은 정치다. 정치를 잘해서 경제가 잘 돌아가면 20조의 몇 배가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 20조 발언이 심각한 부의 편중 문제에 대한 지적이라고 해도 정치로 해결할 문제다. 경제를 죽이는 무능한 정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경제의 근본은 정치

경제는 대통령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할 때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한 걸 보면 경제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매달리고 있는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은 이와는 반대로 가는 정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취업은 더 힘들어졌고 경제지표는 훨씬 나빠졌다. 

정부는 이런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대통령까지 나서 “최저임금의 효과는 90%”라며 옹호한다. 그러나 정부의 경제 분야 책임자인 경제부총리는, 최저임금 1만원은 경제운용에 부담이 된다며 정책의 부적절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통령도 마침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못 지키는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정책 잘못은 아니라는 뉘앙스다.

최저임금의 취지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선의(善意)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자. 만일 누군가에게 식당을 운영하는 형님이 있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이 있다면 그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정부가 끝내 1만원 정책을 고집한다면, 동생의 시급은 오르겠지만 형님은 아르바이트 점원보다 수입이 적거나 묻을 닫아야 하는 상황일 경우에도 찬성하겠는가?

순전히 자신의 동생과 형님만의 문제라면 그렇게까지 고집할 사람은 없다. ’만원’으로 동생이 벼락부자 되는 것도 아닌데 동생 때문에 형님 식당을 망하게 하는 정책에 찬성할 사람은 없다. 물론 한 집안의 사정만으로 정책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만원’때문에 망하는 형님을 둔 집안이 수만 가구라도, 나라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된다면 형님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시행할 수 있다. 한미 FTA나 한중 FTA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국가적 입장에선 마땅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던 것 아닌가?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은 단순한 1만원의 문제는 아니다. 수입이 적은 국민들의 소득을 늘려 이들의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책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경제이론이란 점에서 의문을 갖는 시각이 많다. ’만원’은 이런 이론에 뿌리는 두고 있으면서 허술하고 거칠게 추진되고 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교수는 “너무 영세해서 자기 착취하는 이들까지 자본가로 만들어놓고 최저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논의하지 않고 최저임금을 올린 것부터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서 최저임금을 받는 일자리조차 오히려 사라지고, 자영업자들은 문을 닫아야 할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불복종운동에 나서겠다며 저항하고 있다. 1만원 정책이 당장은 문제가 있어도 나중에는 좋아진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경제부총리가 감히 대통령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1만원 정책을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문제에서 정치 문제로 바뀐 '최저임금 1만원'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이 정책이 경제적으로 옳다는 확신보다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이런 억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1만원 문제가 최저임금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이해가 걸린 문제로 바뀐 상태다. 경제가 망가지고 있는 데도 대통령이 ’90% 효과를 보고 있다”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이제 최저임금자들보다 자신들을 위한 변명이다.

세종이 조선조 최고 명군임은 말할 필요가 없고, 정조 또한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세종과 치적이 비교될 만큼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얼마 전 공주대에서 열린 세종 탄생 600주년기념 세미나에서 한 발표자가 언급한 세종과 정조의 차이점이 눈길을 끌었다. 두 임금 모두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날 세미나에서 발표자는 세종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으나, 정조의 경우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무관치 않았다며 진정성에서 세종에 크게 못 미친다고 평가했다.

역사 전문가는 아니나 발표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고금을 통틀어보면, 대체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정치를 ‘성공적으로 하는’정치인은 극히 일부다. “삼대(三代) 이후로 임금 노릇을 잘한 군주는 백 명에 한 둘도 안 된다”고 했던 송대의 학자 호인(胡寅)의 말은 맞는 것 같다. 조선조에는 오직,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불렸던 세종만이 그 반열에 든다. 개혁군주라는 평을 듣는 정조도 백성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앞세운 정치인의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아직은 결과를 알 수 없는 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초를 이끌어낸 것 외엔 이뤄낸 게 없다. 가장 중요한 경제 분야에서 심각한 적신호가 들어와 있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크게 지지를 보내는 것은 진정성을 믿어주는 국민들이 많다는 뜻이다. 국민은 대통령의 진정을 믿고 있는데, 그게 만약 청와대 일개 행정관의 홍보기법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1만원 정책’은 그런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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