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리아 광장에서 우피치미술관으로 통하는 골목에는 르네상스의 단초를 열었던 불멸의 고전 신곡(神曲)을 저술한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생가가 있다. 단테 생가는 건물의 전경조차 사진촬영을 할 수 없을 만큼 비좁은 골목에 있는데, 오래 전에 없어졌던 생가를 1865년 피렌체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 후 미술작품 갤러리로 사용하다가 1965년 단테 탄신 70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한 것이다. 그렇지만, 단테의 이름만 빌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비좁은 공간의 층계를 올라가면 7개의 방에 걸쳐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그의 행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생가 골목길의 왼편에 단테가 다녔다고 하는 교회와 그 당시 신곡을 출판했다고 하는 인쇄소도 마찬가지이다.

단테(시뇨리아광장)
단테 생가
단테 생가
생가 앞 골목도로의 단테 옆얼굴
생가 앞 골목도로의 단테 옆얼굴

단테는 라틴어가 공용어이던 당시에 라틴어가 아닌 자신이 살고 있는 토스카나어로 그리스 ·로마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하여 F.페트라르카 ·G.보카치오와 함께 ‘문예부흥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그는 피렌체의 정치가였다. 생가 옆의 조그만 성당은 단테가 피렌체 지방의 사투리인 토스카나 어로 신곡을 저술하여 문예부흥의 서곡을 일으킨 곳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의 흔적을 보존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도 문화와 유적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는 잊혀지고 돌아보지 않은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널려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단테
단테

 단테는 최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신생(新生; 1292)에서 자서전적 기록을 썼지만, 정작 부모와 형제에 대하여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그의 가문은 오래 전 아르노 강 둑을 따라 정착했던 로마 병사의 후예로서 고조부인 카차구이다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가 9살 때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위의 베키오 다리에서 동갑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9년 후 우연히 크로체 성당 앞에서 그녀와 재회한 이야기를 썼다. 단테는 그녀가 18세에 결혼해서 1290년 2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했지만, 그녀가 과연 실존인물인지 신곡의 천국 편에서 시인을 인도하는 구원(久遠)의 여성상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만일 그녀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면 당시 피렌체에 살았던 은행가 시모네 데이바르디에게 출가한 F.포르티나리의 딸 비체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집이 단테의 집에서 50여m 떨어졌다고 하면서도 복원하지 못한 것을 보면 상상의 여인일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사후에 천국으로 가는 길을 묘사한 작품 신곡(神曲)은 훗날 많은 예술가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는데,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성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으로 그리기도 했다(최후의 심판에 관하여는 2018. 3. 16. 바티칸(1) 참조).

구원의여성

단테는 22세 되던 1287년 유럽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고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당시 토스카나 공화국은 1289년 교황파(Guelf)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파(Ghibelline)를 누르고 권력을 장악하더니, 교황파는 다시 교황을 지지하는 흑파(Neri)와 교황을 반대하는 백파(Bianchi)로 다시 갈라진 극심한 갈등 상태였다. 1300년 토스카나 공화국을 통치하는 6인의 최고 정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단테는 1301년 10월 다른 두 명과 함께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특사로 로마에 파견된 사이에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샤를(Charles de Valois)의 군대가 피렌체로 진격하여 피렌체를 점령하고 흑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1302년 1월 흑파는 단테에게 뇌물혐의를 씌워서 엄청난 액수의 벌금과 2년 동안 추방, 그리고 영구히 공직 자격을 박탈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피렌체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된 단테는 라벤나의 영주 폴렌타(Guido da Polenta)에 의탁하여 살다가 죽었다. 라벤나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다고 하는데, 그 비용은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시가 속죄하는 의미로 매년 라벤나 시에 지불하고 있다고 했다. 라벤나까지 가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그런데, 중세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던 피렌체에서 바로크(Baroque) 시대를 대표하는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드로잉(drowning)화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크란 17세기 당시 발달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미술을 의미하는데,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가 1983년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화 경매사상 최고가인 32만 4000 파운드(한화 약4억8600만원)에 팔려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이 그림은 1997년 미국 석유재벌 '폴게티'가 다시 127억 원에 구입해서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 벨기에 플랑드르 출신인 루벤스는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이탈리아 유학파인 오토 반 벤(Otto van Veen)에게서 미술수업을 받고 마스터(Master)가 되었으나, 23세 때인 1600년 5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로 갔다. 그는 피렌체에서 만토바의 빈센초 곤자가 공작(Vincenzo I Gonzaga: 1562~1612)의 궁정에서 8년 동안 화가로 활동했는데, 이때 티치아노,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기법을 익혔다. 만토바 공작은 그를 로마로 보내어 루벤스는 1605년 말까지 몬탈토 추기경 밑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1609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귀국했다.

루벤스

루벤스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약한 그의 경력을 높이 산 펠리페 2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많은 제자와 견습생들을 고용해서 여러 성당으로부터 의뢰 받은 수많은 종교화를 그렸다. 제자 중에는 훗날 바로크 시대 거장 반다이크(Vandyke :1599~1641)도 있었으며, 루벤스의 공방에서 제작한 종교화는 당대 최고로서 루벤스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평범한 시민 출신이었지만 귀족보다 더 화려하게 살았던 그가 언제 누구를 모델로 하여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한복을 입은 조선인을 그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가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동하던 1600년~1608년경 전후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끌려갔던 조선인 중 서양 상인들에게 팔려간 조선인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인 관련 기록은 일본에 포교하러 왔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과 함께 종군하여 조선을 여행한 뒤 남긴 이탈리아 출신 까를레티 신부의 기행문(1708년 출판)이 있다. 까를레티 신부는 일본 해안에 수많은 조선인이 잡혀 와서 남녀노소 구별 없이 헐값으로 매매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12스쿠디(scudi)에 5명을 사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인도 고아(Goa)에서 모두 풀어주고 한 사람만 피렌체까지 데리고 왔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풀어주었는데, 그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조선인

그래서 루벤스가 피렌체와 로마에서 머물렀던 때 이 조선인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유명 화가의 모델이 될 만큼 조선인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있어야 할 텐데 안토니오 코레아가 거상으로 성장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 Corea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남부에 칼라브리아 지역뿐만 아니라 피렌체에서 가까운 리보르노에도 같은 지명이 있고, 또 로마에도 Via del Corea라는 길이 있다. 특히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은 일찍이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는데, 이곳의 알비(Albi)라는 작은 마을에도 약2백여 명의 코레아 성씨가 살고 있어서 혹시라도 국제무역이 활발하던 고려시대의 무역선이 지중해에 도착하여 정착한 고려인이 아닐까 하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루벤스의 그림은 생김새나 의복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선비가 분명하고, 그가 까를레티 신부가 데리고 온 인물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갓과 망건은 도대체 유럽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펴고 국내의 어느 소설가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