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문양자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이사 인터뷰
1950년 12월, 제복 입은 장정들에게 아버지 끌려간 뒤 무소식
1977년 경찰 조사 받으면서 아버지 사망 소식 전해 들어
북한군 부역 오명, 대전형무소 수감됐다가 산내 골령골서 사달
1950년 6월 27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전형무소 수감자 대량 학살 추정
19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는 오는 27일 개최 예정

25일 <디트뉴스>와 만난 문양자 씨가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를 가리키며 산내학살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이주현 기자

1950년 12월 어느 날 저녁 대전 동구 가양동의 한 주택. 그날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탓에 하루하루가 불안했지만 가족들과 온돌방에 둘러앉아 밥 한 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찬밥이던 언 밥이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문기자였던 아버지는 갓 태어난 여동생을 안고 밥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편하게 식사하라며 여동생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아버지는 괜찮다고 했다. 아버지가 밥 한 숟가락 더 뜨려는 찰나, 대문 밖에서 장정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보니 까만 제복을 입은 장정 셋이 아버지의 이름을 소리쳤다. 그러더니 아버지의 양팔을 포박했다. 아버지는 장정들에게 끌려가는 동안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대문을 나서 50m쯤 걸었을까. 아버지가 어렵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슬픈 눈이었다. 장정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 중 손이 자유로운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가, 집에 들어가거라, 너네 아빠는 곧 올 거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다. 정말 곧 오실 줄 알았다. 당시 6살이었던 문양자(74) 씨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곤 몇 달 뒤 대전 장안동에 살던 조부모들의 부음 소식이 들려왔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어린 문 씨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1977년 그는 경찰서 연락을 받고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아버지가 1951년 1월 8일 형사재판을 받고 5일 뒤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정들로부터 끌려간 지 불과 한 달쯤 된 뒤였다. 조부모들이 충격을 받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이사를 맡고 있는 문 씨는 25일 <디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어렵사리 회상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울컥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의지할 곳 없던 그는 우선 살아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했다. 아버지의 존재는 각박한 현실에 잠시 잊혀졌다. 그저 행방불명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1977년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엔 말이다.

문 씨는 “경찰서에 갔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내게 묻더라. 왜 사망신고를 했는지. 저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 당시 유성에 살던 8촌 오빠에게 물어봤더니 아버지는 산내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했다”며 “(아버지가)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오명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산내 골령골로 끌려 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자책하며 지낸 지 20년쯤 됐다. 그동안 유족회 등 산내학살사건 등과 관련된 곳이라면 모두 다녔다.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얼마나 억울하게 돌아가셨을지 생각하면 밤에 잠을 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관련 내용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사건발생과 비교해 위령제가 열린 것이 얼마 안 돼 의아했지만,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들이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이때부터 아버지를 비롯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을 위해 관련 일을 했다.

문 씨는 “당시 너무 어린 탓에 지엽적인 내용까지는 기억할 순 없지만 최근 조사 등을 통해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싶다”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25일 <디트뉴스>와 만난 문양자 씨가 산내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골 등이 찍힌 사진을 보며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이주현 기자 

산내 골령골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4000~7000명을 대량 학살한 곳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지역이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 따르면 산내 1차 학살사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발생했다.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가 헌병대와 경찰 등에 의해 처형됐다. 학살규모는 1400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나무에 묶여 눈이 가려진 뒤 총살을 당했다. 50~60구씩 불태움을 당했다.

미군 제25사단 CIC파견대 1950년 10월 7일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에는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됐다”고 기록돼 있다.

2차 산내 학살사건은 같은 해 7월 3일부터 5일까지 발생됐다. 이관술, 여순사건 및 4.3항쟁 관련 재소자 등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제2사단, 제5연대 헌병대 주도로 처형됐다. 학살규모는 18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된다. 1차 학살과 비슷한 방식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7월 6일부터 7월 17일까지 발생한 3차 학살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문 씨의 아버지처럼 북한군에 대한 부역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군법회의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한편, 68주기 19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는 오는 27일 오전 11시부터 낮 1시까지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유족회대전위원회,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하고 대전시, 제주4.3유족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가 후원한다. 이날 유족 150명, 사민사회단체 및 개별인사 100여 명 등 250여 명이 자리할 예정이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관계자는 “70여 년 세월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의 상처는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다행히도 2016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이 산내 골령골로 장소가 결정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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