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북핵 문제는 남한에도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도 미국과 북한이 한국을 빼놓고 이 문제를 협의하면 ‘코리아 패싱(passing)’이다. 중국을 빼놓으면 차이나 패싱, 일본을 제쳐놓으면 재팬 패싱이 된다. 국가마다 패싱 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건 국가의 이익 때문이다. 사전에는 ‘패싱’을 개인이나 단체 국가 간에서 열외 취급을 당하는 경우를 빗댄 말로 설명한다.

한 국가 안에서도 이런 ‘패싱 문제’가 있다. 특히 지역패권주의가 판치는 국가에서 자주 발생한다. 중앙정부가 어떤 지역의 목소리는 귀기울여 들어주면서 다른 지역의 목소리는 외면한다면 외면받는 지역은 패싱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대전 충청은 패싱 지역에 속한다.

대전 위기 요인 ‘서대전역 패싱’엔 언급조차 없는 시장후보들

대전은 위기의 도시다. 최대 요인 중 하나는 떠나가는 호남선, 즉 ‘서대전역 패싱’이다. 호남선(KTX) 노선이 새로 개통되면서 호남선 최대 역이었던 서대전역은 간이역 수준으로 쪼그라들고 있다. 대전은 교통도시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대전 탄생 100년사(史)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도 대전시장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유독 이 문제는 거론조차 안 된다.

서대전역 문제가 본격 제기된 2014년 선거 때는 이를 걱정하는 후보들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선 이 문제에 대해, 처방전은 고사하고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해결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시장후보들조차 시시콜콜한 공약까지 내놓으면서도 대전의 미래를 좌우할 서대전역 문제에는 언급이 없다. 

대신 철도박물관 유치를 공약으로 내놓은 경우는 있다. ‘열차 박물관’이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진짜 열차는 빼앗기고 전시용 모형 열차를 가져오는 꼴이니 대전시민에겐 ‘슬픈 박물관’이 생기는 것이다. 대전시는 이런 박물관 유치를 위해 시민 서명운동까지 펼쳤다. 그러고도 성공하진 못했다. ‘패싱 지역’이 겪는 어려움이다.

대전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철도 도시’임은 전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그 명분으로 철도박물관 유치가 추진되고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호남선을 빼앗겼으니 그거라도 가져오자는 생각이라면 딱한 노릇이다. 늘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빼앗기고 모형 롤스로이스를 선물 받은들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그 모형이라도 받아오자고 목을 매고 있는 게 작금 대전의 모습이다. 중앙정부 입장에서 보면 대전은 너무 착한 도시다. 서대전역 패싱은 여느 도시 같았으면 난리가 날 문제다. 책임을 못지는 대전시장은 물러나라고 하고 지역 국회의원들에겐 금배지 반납 요구가 빗발쳤을 것이다. 그러나 대전은 조용하다.

열번 백번 약속해도 실천은 쉽지 않은 법인데 ‘서대전역 패싱’은 후보들이 입도 못 떼는 문제가 되어 있다. 대전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근본적으로는 ‘대전 패싱’과 패배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넓게 보면, ‘대전 패싱’보다 ‘충청 패싱’이다.

여기서 정권을 잡으면 특정 지역 사람들이 국가 요직을 다 차지하고, 저기서 정권을 잡으면 상대 지역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다 장악하면서, 충청과 기타 지역 출신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데도 충청도에선 말이 없다. “세금은 똑같이 내는데 왜 특정 지역만 해먹느냐”는 항의도 없다. 그래서인지 늘 이런 일이 반복된다. 인사에서도 일에서도 ‘충청 패싱’은 이제 예삿일이 되었다.

‘대전 패싱’ ‘충청 패싱’막아낼 사람이어야 대전시장 충남지사 자격

박근혜 정부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반쪽으로 축소할 때도 대전은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서대전역 경유 문제’로 충청-호남이 의견 대립을 할 때도 호남은 상경 시위까지 하는데, 대전에선 대전시장과 지역국회의원들이 대전역 앞에 모여 ‘안방시위’ 한번 하는 것으로 때웠다. 문재인 정부에선 무안공항 역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조원을 증액하겠다면서도 같은 호남선 KTX 노선인 서대전역에는 직선화 사업의 타당성을 따져보는 비용(용역비)으로 단돈 1억 원을 대주겠다는 데도 별 반응이 없는 곳이 대전이다.

같은 명목으로 다른 지역은 1조원을 더 받고 자신은 1억 원만 받는 데도, 그 1억을 따냈다고 오히려 자랑하는 곳이 대전이다. ‘대전 패싱’과 심각한 ‘패배주의’가 만들어내는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젠 분노해야 할 일과 자랑할 수 있는 일조차 구분하지도 못하는 병이다. 

지역 정치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대전 충청인 모두의 책임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지역 정치인에겐 이런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되는 의무가 있다. 조례나 법률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손바닥보다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명백한 임무다. 그러나 대전시장은 호남선이 대책 없이 떨어져 나가는 데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모든 시도지사가  그런 건 아니다. 재작년 부산시장은 동남권 신공항 유치 실패가 우려되자 시장직을 걸고 반대했다.

사사건건 지역 이익만을 따져 물고 늘어지는 건 졸렬한 지역이기주의에 불과하다.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제 밥그릇을 빼앗기고도 말 한마디 못한다면 부당한 패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대전 충남은 언제부턴가 그런 ‘패싱 지역’이 되면서 이젠 패배주의에 젖어 있다. 이번 대전시장과 충남지사는 무엇보다 이런 문제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너진 충청의 자존심을 세워줄 사람은 정녕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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