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21] 혼란의 시간, 그래도 투표해야 하는 이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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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7표. 투표권을 가진 대한민국 유권자가 6월 13일 행사할 표입니다. 어디 한번 세 볼까요. 광역단체장(시‧도지사), 기초단체장(시장‧군수‧구청장), 광역의원(시‧도의원), 기초의원(시‧군‧구의원), 광역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 비례대표, 교육감.

여기에 충남 천안시 갑과 병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까지 열리니 이 지역 유권자들은 8장의 투표용지를 받아 들어야 합니다. 6월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까지 성사됐다면 한 사람이 무려 9표를 찍는 일이 생겼을 겁니다. 여러 장을 찍는 것도 일이지만, 입후보자가 누가 누군지 당최 알 수 없다는 게 더 유권자로서는 큰 혼란입니다.

며칠 전 천안의 한 식당에 들렀습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이런 하소연을 하십니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말이여, 끼니때마다 시퍼렇고 허연 잠바때기 입고 들어와 명함을 둘려. 한 두 명이라야지 말이지유. 죄송하다고 허니 내쫓을 수도 없구 말여유.”

또 며칠 안지나 대학생인 사촌 동생을 만났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투표할 거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솔직히 TV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김정은이랑 트럼프는 알아도 우리 동네 후보가 누군지는 몰라요. 젊은 친구들 선거에 관심 하나도 없어요.”

시민의 머슴 될 사람들을 뽑는 지방선거인데 정작 유권자들 입에서는 왜 이런 하소연과 무관심이 쏟아지는 걸까요? 너무 많은 후보들이 난립하는 것이 혼란을 부추기는데 영향을 주겠지만 무엇보다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후보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공약을 알리 만무합니다.

하기야 후보들 입장에서도 오죽이나 애가 타겠습니까. 지역발전 이루겠노라 선언하고 나왔으니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자신을 알리고 싶지만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상휘 작가의 소설 《미완의 선거》(렛츠북, 2017)에는 이처럼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절실함이 잔뜩 묻어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리 인사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하는 선거운동이기 때문에 이승제라는 이름 알리기를 빠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름만 알려서도 안 되었다. 무엇으로 나온 후보인지 알려야 했다. 지방선거는 출마자가 많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도지사에 나오는지, 시장으로 나오는지, 도의원으로 나오는지, 시의원으로 나오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중략) 이름을 알리는 일에는 밤낮이 있을 수 없었다. 밤에도 해야 했다. 밤은 어둡기 때문에 중간크기의 사거리나 삼거리에서 인사를 했다. 좀 더 후보와 차량과의 거리를 좁혀 인사하는 자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지난 22일 정운찬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와 대전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야구를 함께 보자고 한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빗속에도 대전까지 와서 연장까지 가는 바람에 무려 4시간을 저와 함께 계셨던 정 총재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대전시장 후보로 나선 분들께 이런 당부 말씀을 하셨지요. “대전야구장 신축 공약이 꼭 지켜지길 바랍니다.” 공약(空約)이 아닌, 실천하는 공약(公約)이 되길 바랍니다.

충청도가 고향(공주)인 정 총재는 MB(이명박 전 대통령)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지난 대선에서는 제3지대에서 대권을 준비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질문을 드려봤습니다. “정치가 야구와 다른 점이 뭐라고 보세요?” 그는 ‘정치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언제 정치했습니까. 정당 활동을 한 적도 없는데요.”

그래서 질문을 바꿨습니다. “정치가 좋으세요, 야구가 좋으세요?” 그는 웃으면서 “이게(야구가) 좋습니다. 허허.” 질문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정 총재였겠지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접했을 ‘정치’에 대한 고단함을 느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거는 자기만 좋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당락은 전적으로 지역 주민들 선택에 달렸으니까요. 민심을 얻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정치입니다. 지역 유권자들 역시 김정은과 트럼프 말고도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가 누구인지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중에 ‘내가 왜 그런 사람을 뽑았을까’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어진 권리는 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고, 우리 동네가 풍요로워지며,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 이들이다. 물론 우리의 필요와 요구가 알아서 제도 정치에 반영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을 포함해 우리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투표권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국가를 중지시킬 수도 있고, 경제 구도를 뒤바꿀 수도 있다. (중략) 그저 민주공화국의 시민이기만 하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로 결심한다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다.”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최태섭, 위즈덤하우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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