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40]
탈북자 [40]
  • 이광희
  • 승인 2018.05.18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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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급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공허한 신호음이 들린 뒤 생소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순하게 느낄 만한 그런 목소리였다.

박 인석씨 계십니까?”

박 부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시는데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한국에서 온 장 민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디 가셨습니까?”

박 부장님은 회의 관계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장 중이십니다.”

언제 쯤 오십니까?”

이번 출장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15일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 혹 연락이 오면 한국에서 온 장 기자에게 전화 왔다고 전해 주세요. 전화번호도 메모해 주시고…….”

,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따냐와 나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을 무렵에 호텔을 빠져나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아내의 흔적이 묻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시내로 향하는 따냐의 차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호텔을 나오기 전에 부총영사에게 전화를 했지만 별무신통 이었다. 아내의 기숙사에서 찾아낸 담배꽁초에서도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채린의 소식은 없었다. 빅또르 김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지 벌써 14일이 지났는데도 털 끝 같은 소식도 접하지 못했다. 속이 들불처럼 타들어갔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따냐와 나는 그길로 네다섯 곳의 주점을 돌았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흔적은 묻어 있지 않았다.

따냐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차를 멈춘 곳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선술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붙어 있는 골목의 입구였다. 낡은 건물들이 초라하게 늘어 선 외양으로 미루어 이곳이 불법으로 이루어진 홍등가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간판조차 없는 선술집의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불빛이 커튼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나는 골목입구 공터에 혼자 내렸다. 따냐는 애써 차창 너머로 몸조심 할 것을 당부했다. 어린아이를 물가에 세운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좁은 골목은 먹물을 뒤집어 쓴 듯 캄캄했다. 길바닥이 기분 나쁘게 질척거렸고, 매스꺼운 냄새가 흙바닥에서 피어올랐다. 간간이 삐죽하게 선 전주는 지친 허수아비처럼 전깃줄을 늘어뜨렸다. 의도적으로 불을 밝히지 않은 탓인지 해골같이 하얀 초승달만 중천에 걸려 있었다. 골목 언저리에는 빈 깡통과 휴지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이 희끗 거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령의 도시를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긴장으로 등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첫 번째 집 문간에서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 틈으로 속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공간이 멋쩍게 도리어 나를 넘어다 봤다. 나는 집집마다 창문을 기웃거렸다. 철시를 한 듯 조용했다.

범죄와의 전쟁 탓에 철시를 한 걸까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골목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골목 중간쯤에 있는 시멘트 구조물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느 집이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사내들이 바람난 암고양이같이 어둠속으로 기어들어 가면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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