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객실 창문 아래 놓인 싱글소파에 앉았다.

따냐가 개인적인 일로 아침 일찍 올 수 없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켰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주소록을 뒤졌다. 정확히 4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게 유달리 친절을 베푼 박 인석의 전화번호를 낡은 메모지 갈피 속에서 찾았다.

그는 당시 한국 기업의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홋카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이곳 취재를 끝내고 귀국한 뒤에도 계속 연락을 해왔다. 물론 나는 바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주 편지를 하거나 전화로 연락을 취하지 못했지만 잊지 않을 만큼 아주 간간이 그에게 전화를 했다. 또 불현듯 이곳 풍경이 그리워질 때면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작은 성의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고마워했다. 또 현지 실정에 대해서도 곧 잘 얘기했다. 장사 얘기며 여기 사람들의 얘기, 날씨, 신문에 게재된 사건 등이 그가 내게 들려준 이곳 소식이었다. 솔직히 그런 얘기들이 내 흥미를 끌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국내에서 만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는 휴가차 국내에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고 내가 말 할 때마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블라디미르 선상호텔 커피숍에서였다.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를 취재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 때여서 길을 묻는 것조차 어색했다. 레스토랑에서 어떤 음식을 시켜야 할지도 몰라 생땀 만 흘리곤 했다. 그때 우연찮게 필리핀 선원 등 일행과 함께 온 그를 만났고, 그는 우리의 손에 모든 것을 들려주듯 친절을 베풀었다.

혼자 밤길을 걷거나 또 혼자 택시를 탈 경우 괴한들에게 납치될 수도 있다며 겁을 잔뜩 준 것도 그였다. 오후 6시 이후에는 3명 이상이 뭉쳐 다녀야 하며, 버스를 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그가 들려준 얘기였다. 특히 그는 현지 고려인들의 생활상에 대해 누구보다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 대해 자신이 나홋카에 있는 고려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는 자신이 이곳 고려인들에게 처음으로 멸치국물 우려내는 법을 전수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자랑했다. 그가 처음 나홋카에 갔을 때만 해도 그곳 고려인들이 멸치를 가축의 사료로만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루는 하숙집 주인에게 시원한 멸치국물에 수제비를 먹고 싶다는 주문을 하자 가마솥에 하나 가득 멸치를 삶았다고 했다. 웃지 못 할 일이지만 그곳 사람들이 멸치국물 우려내는 방법을 몰라 그렇게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주소록을 중간 쯤 뒤졌을 때 박 인석이란 이름이 빽빽이 적힌 주소 속에서 보였다.

나홋카 4가 포트바야 25번지.’

전화번호 5-066-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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