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철학 수업 중에 선생님이 교과서를 보며 말씀하셨다. 공자 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우리의 인생은 깨달음의 연속이고 애석하게도 직접 경험 한 후에야 그걸 알게 된다.

그날 나는 당황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난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처가에 갔을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고모부, 아는 게 힘이 맞아요? 모르는 게 약이 맞아요? 아마도 그 아이는 상충되는 것, 모순되는 속담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아이의 진지한 자세가 내심 기특했지만 그걸 고민해 보지 않은 나는 마땅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변을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입안에 맴돌고 있던 말을 겨우 뱉어냈다. 그게 말이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단다. 다시 말하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야. 이게 맞을 수도 있고, 저게 맞을 수도 있고…… 조카에게 설명을 해주는 동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린 아이에게 이 무슨 상투적인 얘기란 말인가?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나는 그 말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맞는 것일까. 이런 진지한 고민을 통해 나는 분명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조카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모르는 게 약이 맞다’고 얘기할 것이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필요 없는 것, 몰라도 되는 것, 쓸데없는 것을 알게 되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지역방송사에서 ‘내 고향 청풍명월’이란 TV프로그램의 리포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촬영을 위해 6명이 한 팀이 되어 매주 대전과 충남·북을 돌아 다녔다.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우리는 유성에서 공주로 가고 있었다. 계룡산 입구 삼거리에서 공주 쪽으로 백 미터쯤 지나갔을 때 담당피디가 손을 들어 산중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집이 우리 제작부장님의 집이야.” 당연히 우리의 시선은 피디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멋진 집이었다. 그 집은 산을 절반쯤 깎아 만든 곳에 위치한 전원주택 단지의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 이층으로 지어진 하얀 집을 보며 누군가는 나도 나중에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로망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 날, 우린 또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스텝 중 한명이 부장의 하얀 집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제작부장님의 집이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건 지난번에 얘기 했지 않았냐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그런데 비슷한 일은 그 후에도 반복되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그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저기 있는 저 집이……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여길 지날 때는 그 말을 해야 한다고 헌법에 정해져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모두 알고 있으니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은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선은 부장의 하얀 집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저 집이…… 그때 나는 이런 결론을 얻었다. 알아도 되지 않는 것, 또는 필요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생각이 많아지고 그것은 공해가 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뀐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우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집 거실의 형광등이 켜지지 않아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전등갓을 열어봤다. 원형으로 된 두 개의 형광등이 켜지는 구조였는데 한 개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실험을 해본 결과 안정기의 고장이란 결론을 얻었다. 일단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두고 안정기를 떼어냈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쪽보단 안정기만 바꾸기로 마음먹은 나는 고장 난 안정기를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조명가게를 찾아갔다. 똑 같은 것으로 달라고 말하자 눈매가 쭉 찢어진 사장이 교체해 본적이 있냐고 물어봤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자신이 갈아 줄 테니 출장비를 달라는 것인지,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찢어진 눈매가 말했다. 하다가 안 되면 가지고 오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그제야 나는 그의 진심을 알아들었다. 나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해보진 않았지만 전선이 많지 않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웬걸. 확신과 실제는 거리가 멀었다. 집에 돌아와 전선을 이리저리 연결해도 형광등은 켜지지 않았다. 미리 찍어둔 핸드폰 사진도 소용없었다. 어느덧 태양은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왔지만 우리 집은 환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배고프니 저녁을 먹고 하자는 아내 말에 나는 버럭 성을 냈다. 지금 밥 먹을 정신이 어디 있어. 도와주진 못 할망정… 가시 돋친 내 언성에 아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거세게 닫으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에게 잠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사과하진 않았다. 나는 고민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결국 이리저리 수소문 한 끝에 전기 일을 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수화기 저쪽에서 이쪽에 있는 내게 지시했다. 천장에서 나온 노란 선을 첫 번째 안정기에 연결하고, 그 옆에 있는 파란 선을 두 번째 안정기에 연결해야 돼. 그럼 빨간 선은 어디에 연결 하냐? 그건 첫 번째 안정기 다른 구멍에 넣어야해…… 한참동안 천장을 쳐다보며 작업을 해서인지 목이 뻐근하고 허리에 통증이 왔다. 하긴 한 시간 넘게 그러고 있었으니 아플 만도 했다. 한참을 끙끙 댄 끝에 드디어 불이 켜졌다. 나는 도움을 준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도 헤매고 있을 거다. 내가 밥 한번 살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도와줘야지. 근데 이참에 LED 등으로 바꾸지 그랬냐. 요즘은 가격이 많이 내려가서 오만원도 안되는데…… 전기료도 형광등의 3분의 1밖에 안 나와서 경제적이야.”순간 내 머리 위로 불꽃이 튀었다. 내가 화난 이유는 간단했다. 작업을 하기 전에 미리 말을 했으면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거 아닌가. 나는 친구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걸 왜 이제야 말 하냐고, 너 때문에 헛고생 했다고. 내가 계속 투덜대자 친구가 내게 되물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넌 나에게 LED에 관해서 물어보기나 했냐?”

나는 그때 진정으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내 인생은 항상 그랬다.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 미리 준비 하거나 위험에 대비 하지 않았으며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고등학교가 없어 아이들이 먼 곳으로 통학한다는 말을 듣고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며 신경 쓰지 않다가 우리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 갈 때 불편함을 알게 되었다. 지역주민들이 교육청에 고등학교를 세워달라는 민원을 넣을 당시에 나도 힘을 보탰다면 더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 가방을 미리 꾸려 놓지 않았다. 결국 떠나기 전날에야 허겁지겁 짐을 챙겼으니 빼놓고 온 것이 너무 많았다.

내 후배 정동석은 나와 반대되는 삶을 산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아는 것이 많아 인생이 편하다. 맥주를 따르기 전에 종이컵을 생수로 헹궈주면 거품이 적어지고, 우리나라 고무장갑이 빨간색인 이유는 김장할 때 고춧물이 들어도 표시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며, 목요일보다 금요일의 영화 관람료가 2천원 비싸다는 것도 동석이가 알려주었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 아이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일부러 찾아보는 것일까. 한번 들으면 잊지 않는 것일까.

얼마 전, 나는 후배 동석이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믿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궁금하면 인터넷을 찾아보면 되잖아요? 동석이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내개 말했다. 자전거와 함께 지하철을 탈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전도시철도공사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주말과 공휴일에 한해 일반 자전거를 휴대하고 전동차에 탈 수 있으며, 별도의 추가 요금은 없다.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곳은 앞·뒤 칸 전용공간으로 지정돼 운영되며, 바닥면에 '자전거 휴대 승차위치' 스티커와 함께 노란 선으로 구분해 놓았다.’


내 입이 쩍 벌어졌다. 보도 자료를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어느 한부분에서 딱 멈추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거기에는 적혀 있었다. ‘2012년 8월부터 시행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던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내 인생은 늘 뒷북만 쳤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몰랐고 어느 땐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이제라도 그걸 깨닫게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 일지라도 알려고 귀를 열어둘 것이고, 아는 것이라 할지라도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해봤던 것은 다르게 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닐까.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