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의 사진하나, 이야기 하나, 생각하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86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다니!

조물주 위에 있는 이가 건물주란다.

이런 꿈을 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은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효율이라고 가르친 우리의 죄이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옛 어른들은 "흉년에는 논도 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투자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을 앗아간다.

왜냐하면 재화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누군가 많이 소유하면 누군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불평등, 양극화가 나온다.

최근의 자본 소유 과정을 보면, 금융에서 돈을 축적한다. 옛날에는 제조업이나 노동을 통해 돈을 벌었는데, 그리고 그 소득에 대한 세금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금융에서 자본으로 돈을 더 많이, 쉽게 벌고, 세금은 옛날보다 소득에 비해 더 적게 낸다. 한국 사회 부자들은 권력까지 동원해 자본을 축적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인재를 스카우트 해 '패거리'를 만들어 자신들의 성을 더 튼튼하게 하며 '거미줄'을 만든다.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한다.

난 그 논리를 알고, 이젠 부자들을 오히려 경멸한다.

그러나 본말을 구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니, 어찌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어린 학생의 꿈을 탓할까! 건물주가 조물주보다 더 나은 세상인데......

어쨌든 세상에 태어나 겨우 그만큼만 꿈꾸게 아이들을 만들어서 어른인 내가 미안하다. 다만 '착한 건물주'가 되라고 하지 않겠다. 그것은 모순형용의 개념이니까.

한 트위터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여학생이 매월 400만원의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가 되었다면 그 아이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어? 시급 6천 원짜리 알바 뛰는 언니 오빠들은 사람으로도 안 보일 테고, 월 100만원 받는 청소 노동자는 또 뭐로 보일까? 아 문제는 부의 세습이다. 이런 사람이 권력까지 쥐는 공직자는 안 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문장 하나 87

(사진87) 강경포구.

인생이란 앞 강물, 뒷 강물하면서 흘러가다가 하구에 이르면,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난 바다로 안 갈래"하면서 버티면, 그게 웅덩이가 돼서 고이고 썩는다.

그러면 노년이 추하다.

자연스럽게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된다.

그래서 나이 들면 자연과 잘 어울려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그렇게 너나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주어진 길을 꿋꿋이 헤쳐나갈 뿐, 누구라도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진 못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이야기 하나 88

기술발전을 마냥 좋아해서는 안 된다.

기술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기술은 인간의 아이디어로 생명을 불어넣기 전까지는 꼼짝없는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핵분열은 인류가 달성한 가장 놀라운 업적 중 하나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우리 '종'이 여태껏 맞닥뜨린 가장 큰 생존의 위협이기도 하다.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인 '하버 법'은 합성 비료 제작으로 곡물 수확량을 증대시켰다. 하버 법을 발명한 프리츠 하버(Fritz Harber)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했다는 평을 들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하버는 화학전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6만 7000명의 사상자를 낸 독가스 살포를 직접 감독했다.

보안 전문가인 마크 굿맨(Marc Goodman)이 했다는 다음의 말을 들어 보면, 항상 그래 왔다는 것이다. "최초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불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도 사용되었지만, 옆 동네에 불을 지르는 데도 쓸 수 있었다."

기술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할지, 결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우리의 예상과 완전 딴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도를 가진 '모델링' 작업이 사유하거나 기술을 구현하는 데는 좋지만, 그 의도를 먼저 윤리적으로 점검하여야 한다. 어떤 의도는 타인과 세상에 '폭력'일 수 있다.

나치를 겪은 엠마뉴엘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을 쓰면서 강조한 부분이 이 문제이다. '의도'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에는 타자를 자기화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동일자의 폭력'이다. 그것을 그는 '전체성'의 시작으로 보았고, 타자의 현현으로 다가오는 타자로의 초월이 오히려 우리를 '무한'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문장 하나 89

'친구'란 인디언 말로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숨은 의미를 알게 된 뒤로 나는 누군가를 사귈 때 정말로 그의 슬픔을 내 등에 옮길 수 있을 것인가를 헤아리게 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90

진정한 관계를 와인에서 본다.

물이 물을 잃지 않으면서 불에 자신을 맡기고, 불이 불을 잃지 않으면서 물의 몸을 덥혀준다. 그러면서 물과 불의 신묘한 맛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술이다. 술은 모양은 물인데, 그 속에서 불이 들었다고 해서 '술(수+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술은 '불을 품은 물'이다. 그러한 술중에 사람이 외부에서 한 방울의 물도 넣지 않고, 포도가 가지고 있던 물만 넣은 것이 와인이다. 그래서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물이 여성이라면, 불은 남성이다. 와인은 물과 불의 결합이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이다. 한문으로는 좋아할 '호'자가 된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면 좋은가 보다.


박한표 인문운동가,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관광대학원 초빙교수, 프랑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전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프랑스 문화원 원장, 와인 컨설턴트(<뱅샾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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