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62]

1-1 카프리 섬 지도.
1-1 카프리 섬 지도.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의 3대륙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다다. 따뜻하고 포근한 지중해의 작은 섬 크레타에서 고대 그리스문명이 시작했고, 오랫동안 문명의 꽃을 피우던 그리스는 지중해의 대제국 로마에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대서양을 무대로 살다가 1505년 스페인 항해사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 1521)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해서 7년을 머물다가 귀국한 뒤 이듬해 다시 항해에 나서 태평양을 거쳐 1522년 이스파냐(스페인)로 귀국함으로서 첫 세계 일주이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후 유럽 국가들은 대서양~인도양~태평양 사이의 뱃길 단축에 노력하여 1869년 지중해의 이집트와 아시아 대륙 사이의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개통함으로서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도는 뱃길을 크게 줄이고 지중해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대서양에서 지중해를 거쳐 인도양~ 태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은 유럽 대륙 남단인 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남쪽과 아프리카 모로코의 북단 탕헤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Gibraltar Straits)인데 사실 지브롤터 해협이란 지명은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의 명칭이고 아랍권에서는 자카크 해협(Zakak Bãb al)이라고 한다.

카프리 섬.
카프리 섬.

그뿐만 아니라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을 거쳐서 유럽 남동부와 아시아 사이에 있는 흑해(Black Sea)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한데,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동방의 별 터키 이스탄불이 있다. 그런데, 지중해는 워낙 넓어서 터키․그리스 부근의 이오니아 해(Ionian Sea)를 동지중해 이베리아반도와 모로코 지역의 서지중해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부근의 중지중해로 나누기도 하고, 지중해를 향해서 장화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반도 사이를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코르시카․시칠리아 섬 등이 있는 일대를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라고 세분하기도 한다. 티레니아 해에 있는 작은 섬 카프리(Capri Isl.)는 대륙 속의 바다라는 특성상 일 년 내내 따뜻한 햇볕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2. 카프리섬 전경.
2. 카프리섬 전경.

카프리 섬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로서 영국 찰스 왕세자와 불의의 사고로 이제는 고인이 된 다이애나가 결혼 후 자신의 요트를 타고 신혼여행을 즐겼고, 우리의 축구선수 박지성도 신혼여행을 갔을 만큼 유명하다. 기원전부터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카프리의 섬 이름은 카프라(Capra: 염소) 혹은 카프로스(Kapros: 멧돼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섬을 점령한 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AD14)와 2대 티베리우스(Tiberius Augustus: 14~37) 황제의 별장이 되어 그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중세에는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 귀속되었다가 아말피 공화국의 일부로, 그리고 다시 나폴리 왕국에 넘어갔다가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때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번갈아 점령했다가 전쟁이 끝난 1813년 시칠리아 왕국에 반환되는 등 빈번하게 주인이 뒤바뀐 조금은 불운한 섬이다.

2-1 선착장에서 본 카프리섬 산악도로.
2-1 선착장에서 본 카프리섬 산악도로.

카프리는 나폴리에서 정기여객선이 출항하는데 카프리까지 가는 1시간 동안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그렇지만, 화산 폭발로 1500년 동안 땅속에 묻혔다가 살아나 불운의 도시 폼페이를 거쳐 소렌토에 도착했던 우리가족은 이태리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소렌토에서 카프리 섬으로 가는 페리를 탔다. 카프리까지는 뱃길로 약32㎞이고, 약30분정도 걸렸다. 카프리는 가로 6㎞, 세로 2㎞로 약간 긴 네모꼴로서 주민은 겨우 7천 명가량 살고 있고, 섬의 최고봉은 ‘태양의 산’이라고 하는 몬테 솔라로(Monte Solaro: 589m)이다. 섬에는 나폴리와 소렌토 쪽에 있는 마리나 그란데항과 그 반대쪽인 마리나 피코라 항 등 두 개의 항구가 있지만, 마리나 그란데항이 단연 활발하다.

2-2 카프리섬 도로.
2-2 카프리섬 도로.

카프리 섬 역시 지중해의 바다 속이 그러하듯 석회암 지대여서 섬의 주민들은 아름다운 해안도시 소렌토처럼 고기잡이가 아닌 숙박업 음식점 기념품판매 등 관광객을 상대로 살아가고 있다(2018.04.08. 돌아오라 소렌토로 참조). 항구에 고깃배는 하나도 없고 유원지처럼 크고 작은 요트와 유람선만 가득했으며 우리의 눈에는 조금은 어설프게 보이는 빈약한 모래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여행객들뿐이었다. 섬에는 택시도 있지만 워낙 좁은 섬에 많은 관광객들이 붐벼서 택시를 탈 수도 없지만 요금도 터무니없이 비싸서 대부분 미니버스나 푸니쿨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티켓은 버스와 푸니쿨라에 공용으로 사용되며 환승도 가능하다. 편도는 1.8유로이고 1일권 패스는 8.6유로다.

3. 콘돌라(자료화면).
3. 곤돌라(자료화면).

1826년 해안에 있는 수많은 천연동굴 중 한 곳인 그로타 아추라(푸른 동굴)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바캉스 족이 아니면 푸른 동굴 관광과 몬테 솔라로에 올라가서 바다를 조망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우리도 ‘푸른 동굴’ 관광을 포기하고 몬테 솔라로를 올라가는 곤돌라 승차장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마을버스와 비슷한 미니버스를 탔다. 선착장에서 섬의 중심지인 카프리까지 그리고 카프리에서 다시 섬 정상인 몬테 솔라로를 올라가는 곤돌라 승차장까지 미니버스와 푸니쿨라를 갈아탔는데 가파른 지형이어서 폭이 3∼4m도 되지 않을 좁은 산길을 운전기사는 마치 곡예 하듯 운전하며 올라갔다. 아슬아슬한 커브 길을 돌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3-1 정상에서 바라몬 카프리 섬.
3-1 정상에서 바라몬 카프리 섬.

가파른 산길을 약20분쯤 올라가서 도착한 곤돌라승차장은 움베르토 1세 광장(Umberto)이라고 하지만, 워낙 비좁아서 광장이란 명칭이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움베르토 1세(1878~ 1900)는 이탈리아 통일 후 초대 임금이 되었던 비토리아 에마뉴엘 2세의 아들로서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때 큰 공을 세웠는데 1900년 1월 북부 밀라노 부근의 몬차(Monza)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총을 맞고 죽었다(비토리아 에마뉴엘 2세에 관하여는 2018.03.19. 로마 베네치아 광장 참조).

3-2 카프리섬의 별장들.
3-2 카프리섬의 별장들.

몬테 솔라로로 올라가기 위해서 리프트를 탔다. 리프트는 스키장의 리프트와 비슷했지만 케이블 두 가닥에 매달린 1인용 철제의자로서 비바람은 물론 추락을 막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허술하고 불안한 구조였다. 하지만 남녀노소 모두 그런 리프트에 성큼 올라타고 또 내려오는 것에 안심을 하고 줄을 섰다. 설령 추락한다고 해도 2∼3m 높이에서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자위를 하며 올라갔는데, 바라보는 사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나지막한 섬 사방에 마치 벌통처럼 가지런히 줄지어 놓은 하얀 페인트칠한 수많은 단층건물들은 세계 각국 부자들의 값비싼 여름철 별장이라고 했다.

4. 해안동굴(자료화면).
4. 해안동굴(자료화면).

몬테 솔라로 정상까지는 약15분 정도 걸렸는데 정상에는 기대와 달리 초라한 가게와 그늘막이 하나씩 있는 이외엔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성모마리 상이 홀로 푸른 녹이 슨 채 드넓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발 고작 589m이어도 사방이 툭 트여서 아름다운 섬과 푸른 바다가 멀리까지 보이는 눈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산에서 내려왔지만, 몬테 솔라로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지중해의 모습과 짜릿한 감정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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