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자료사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정치인으로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도덕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거의 드러났다. 국회의원 시절에 했던 말과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정치인이었는지 충분히 드러났다고 본다. 김 원장 자신보다는 그를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각이 놀랍다.

청와대는 “김 원장이 자신의 업무를 못할 정도로 도덕성이 훼손되거나 일반적 국회의원의 평균적 도덕감각을 밑도는지는 의문이다”고 하였다. 청와대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는 대한민국 정치인의 수준이 그야말로 수준 이하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겠지만, ‘김기식의 수준’이 정말 평균 이상이라면 우리 정치는 털끝만한 희망도 없다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권부인 청와대라는 곳에서 ‘그래도 김기식은 평균 이상’이라고 내놓는 반응 자체다. ‘어차피 대한민국 정치는 X판인데 뭘 더 바라느냐?’는 얘기 아닌가? 그놈이 그놈인데 그 중에 한 명 쓴 걸 갖고 너무 따지지 말라는 말 아닌가? 김 원장 수준보다 청와대 수준이 더 걱정이다.

더 놀라운 건 김기식의 처신 행적보다 청와대 인식

김 원장이 어떤 인물이든 인사권자가 끝까지 써야 한다면 쓰는 거다. 그건 대통령의 권한이다. 다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반응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뜻이 늘 절대적일 수는 없으며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애매하다. 인사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신뢰할 수 있는 공식 여론조사를 벌여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너무 못 믿는 일이다. 인사 문제는 대통령이 판단해서 결정하면 된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김 원장의 사퇴에 찬성하는 사람은 50.5%, 반대하는 사람은 33.4%다. 청와대가 이 조사를 신뢰한다면 김 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가 이 문제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여론조사보다 문재인 정부의 자신의 국정철학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철학이 아니라 법으로 사람을 쓰겠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 원장의 위법성이 드러나거나 도덕성이 평균 이하라고 판단되면 사임시키겠다고 했다. 인사에서 법은 대통령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법이지 그것이 인사, 특히 요직 인사의 기준일 수는 없다.

만약 지금 벌어지고 있는 ‘김 원장 사건’과 똑같은 일이 전임 정부 때 발생했다면 지금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즉 당시 야권 인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경우에도 ‘국회의원 평균’ 운운하면서 청와대와 김 원장 편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야권에서 보이는 반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에 대들보는 안 보이는 법이긴 하나 우리 정치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고 심하다. 문재인 정부에게 국민들이 기대하는 적폐청산은 이런 것부터 좀 바꿔보라는 것 아닌가? 과거의 불법과 부정을 단죄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게 적폐청산의 명분이고 이유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일단 권력을 잡으면 청산작업을 하는 사람의 수준과 그 수법이 과거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늘 현 정권은 다음 정권의 청산 대상이 된다.

어떤 권력이든 집권하면 개혁을 외친다. 전두환 시절조차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개혁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권이 외친 것은 ‘국가 정상화’였지만 자기 임기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비정상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보라고 국민들이 밀어준 권력이 문재인 정권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이 일부 정치보복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인정을 해주는 이유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 인사 박근혜 정부의 인사불통과 뭐가 다른가?

지금 청와대가 김 원장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현 정부가 이전의 적폐 정부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김기식의 도덕성은 평균 이하가 아니다’는 청와대 해명은 마치 우리도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국민여러분, 까놓고 말하면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리 야단입니까?” 하는 말로 들린다. 솔직해서 좋은 건 있다. 문제는 솔직한 말이 이 사건을 보는 청와대의 진짜 인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솔직한 말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오만할 때도 솔직한 말이 나온다. 오만은 힘 있는 자의 권리다. 김기식 사건으로 국민에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그의 처신과 행적보다 청와대의 오만이다. 국회의원 절반이 김 원장 이하 수준인 나라에서 청와대만 멀쩡할 리 없다. 이대로 가면 문재인 정권도 박근혜 정권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무너뜨린 것은 세월호도 최순실도 우병우도 아니다. 권력 자신의 오만이었다. 권력의 오만은 불법과 부패로 이어지게 돼 있다. 당시 청와대는 언제부턴가 인사 문제에서 고집불통이 이어지면서 야당의 반발을 샀고 나중에는 여당조차 손사래를 쳤다. 민심은 등을 돌리게 돼 있고, 여당은 이길 수 있는 선거에도 졌다. 이로 인해 대통령 자신이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5000만 명이다. 아무리 인물이 없어도 청와대 스스로가 ‘형편없다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평균’과 비교해야 할 사람을 요직에 앉혀놓고 인사 고집을 부리는 건 청와대의  오만이다. 야권에선 김 원장 인사를 비판하면서도 내심으론 청와대가 계속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선거 정국에선 종종 ‘오만한 청와대’가 야당을 응원하는 결과가 된다. 그럼에도 대개 청와대는 ‘밀려선 안된다’는 생각에 고집을 꺾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것 같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김 원장의 위법성과 도덕성의 평균을 운운하는 것은 법을 퇴로의 수단으로도 쓰겠다는 뜻도 있으나 기본적으론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뜻이다. 진정한 개혁은 최고의 인재를 모아도 어려울 텐데 ‘대한민국 정치인 평균’과 비교해야 정도의 인물을 감싸며 고집하는 정부가 성공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개혁 고기’를 잡겠다며 '적폐 나무'에 오르고 있다. 과거 거의 모든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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