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눈을 부라리며 권총을 머리에 들이 댔지만 채린은 비명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얇게 찢어지는 듯 한 파장이 뒷골을 끈질기게 당겼다. 나는 귀를 막고 그에게 당장 아내를 풀어 주라고 표독을 떨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목젖을 넘어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채린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애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에다 권총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내가 악을 쓰며 발버둥 쳤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발버둥치는 나를 본 척도 않고 채린의 머리에다 방아쇠를 당겼다.

이럴 수가 .......”

나는 말문을 더 이상 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채린은 멍하게 뜬눈으로 그자 앞에 꼬꾸라졌다. 순간 내 몸이 불덩이같이 끓어올랐다. 숨이 턱턱 막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꿈이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노크 소리가 계속 들렸다. 따냐였다. 그녀는 문 밖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문을 열었다.

채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괜한 꿈일 거야.’

그렇게 자위했다.

따냐는 전날과 달리 엷은 티셔츠에 밝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는 맞춘 듯이 꼭 맞았으며 숨통이 조일만큼 목 아래 부분까지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총영사관에 약속은 됐지요?”

. 다행이 총영사께서 자리에 계신답니다.”

 

한국 총영사관은 외교 공관이 밀집된 도심 한편에 있었다. 10층 건물의 6층을 빌려 통째 사용했다. 건물 창밖으로 태극기가 삐죽이 나와 있어 이곳이 총영사관이구나 하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예상과 달리 경계가 삼엄했다. 러시아 경찰들이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공관으로 오르는 길은 경계가 더욱 삼엄했다. 현지 경찰은 공관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 신원을 확인 했다. 그들은 딱딱한 말투로 입버릇처럼 질문을 반복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함은, 나이, 국적,......”

그들은 내게도 공관을 찾은 용무를 묻고 그것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수속이 끝나자 경비 담당자로 보이는 사내가 내 몸수색을 했다. 그는 뚫어지게 내 아래 위를 훑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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