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는 텅 빈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을 지나 10월 혁명 탑이 서 있는 광장 옆 레닌거리를 가로 질렀다. 긴 외투를 두텁게 입고 선 병사의 동상이 30미터는 치솟아 있었고 총검을 들고 선 사내의 주먹만 한 눈빛이 어둠에 빛났다. 그는 부라린 모습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물결을 응시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선상호텔은 10월 혁명 탑을 지난 뒤 곧바로 나타난 극동군 사령부 맞은편 항구에 떠 있었다. 여러 척의 군함들 사이에서 상아빛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소련 시대에 호화 여객선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은 다른 항구의 그것과 유달랐다. 돛에 매달린 배들의 불빛이 마치 황금 거미처럼 사방에서 꿈틀거렸다. 항구 주변에는 도심에서 흘러내린 빛의 파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밤바다에는 피로에 지친 빛줄기들이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널브러졌다. 어둠을 비집고 고개를 들이민 빛의 잔치판 이었다.

따냐는 내게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호텔로 다시 찾아오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곧장 호텔 앞에서 차를 돌렸다.

[5] 총영사관과 빅또르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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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달려온 화물선의 뜨거운 엔진 소리에 잠이 깼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커튼을 열어 젖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항구는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고무풍선 같은 구름떼가 겹겹이 쌓여 무겁게 선상 호텔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는 일찌감치 샤워를 하고 조찬을 시켜든 뒤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따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두어 평 남짓한 호텔 언저리에 놓인 딱딱한 침대에 등을 비스듬히 기댔다. 약간의 나른함이 눈자위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잔잔한 물결 같은 졸음으로 밀려왔다.

나는 호텔 레스토랑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창밖으로 보이는 항구의 풍경을 내다 봤다. 수면 위를 낮게 날아가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햇살에 빛났다. 은빛 물결이 눈부셨다. 그 때였다. 며칠 전 레스토랑에서 본 그 사내가 후다닥 유리문을 부수며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으며 입에는 피를 가득 물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떨며 구석에 웅크리고 섰던 여종업원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그는 들리지 않는 입놀림으로 무슨 말인가를 계속했다. 악을 쓰고 있었다. 눈을 부라리며 광란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핏방울이 튀어나와 종업원들의 하얀 드레스에 죽은 깨알같이 박혔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로 초췌한 모습의 채린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핏기 없는 얼굴이 하얀 각시 탈을 쓴 것같이 보였다. 그녀는 겁에 질려 연신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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