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1.나폴리폼페이 지도.
1.나폴리폼페이 지도.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270km 떨어진 해안가 도시 폼페이(Pompeii)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Vesuvio Mt. 1277m)의 화산 폭발로 15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592년 폼페이를 가로지르는 운하건설 공사 중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불운의 도시다. 당시 폼페이시가 있는 남동풍이 불어서 폼페이는 화산재로 뒤덮인 반면에 반대편 엘코르라에는 많은 용암이 흘러내려 약400여m나 쌓였다고 하는데, 약200년가량 발달했던 폼페이시는 갑작스런 화산 폭발로 2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과 함께 순식간에 화산재에 매몰된 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진 전설의 도시였다. 베수비오 산은 1795년에도 폭발하고, 1944년에도 폭발했는데, 화산폭발로 높이가 200m나 낮아졌다고 하지만, 당시 어느 누가 정확하게 고도를 측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폼페이 유적이 처음 발견되자 도굴꾼들은 보물이 묻혀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도굴이 성행했지만, 1748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 부르봉왕조(Bourbon Dy.: 1589~1792)때부터야 본격적인 발굴에 나섰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 된 이후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이후 현재 약80%가 발굴되었다.

1-1 폼페이 유적지 입구.
1-1 폼페이 유적지 입구.

199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폼페이유적을 보러 폼페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사실 많은 여행객들은 로마에서 매30분마다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1시간 10분 만에 나폴리에 도착한 뒤 약26㎞ 떨어진 폼페이까지 매2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소렌토 행 열차로 갈아타지만, 기차를 타면 중간의 도시를 구경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로마시내를 벗어나 약25㎞w쯤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주의 명산지 프라스카티(Frascati)가 있고, 이어서 왼편 베네딕토 산(244m) 위로 하얀색 건물 베네딕트 수도원(Monasty at Mt. St.Benedicto)이 있다. 12~3세기에 타락하는 기독교의 정화를 주장하던 예수회, 프란체스코회, 프레몬트레회, 베네딕토 회 등 여러 수도회가 있었지만, 529년 성 베네딕토(St. Benedicto: 480~560)가 세운 베네딕트 수도원이 가장 많은 활약을 하고 널리 알려졌다.

1-2 베스비오화산.
1-2 베스비오화산.

조금은 한산한 도시 폼페이 역 광장에서 버스를 내린 뒤 기차역을 왼편으로 돌아가면 폼페이로 올라가는 길이다. 잡초가 우거진 시골 개골창 같은 낮은 해자(垓字)는 그 옛날 폼페이 항에 물건을 싣고 내리던 바닷가로서 지명은 폼페이 항(Porta Marina)이지만, 지금은 토사가 쌓여서 개골창처럼 변했다. 폼페이 유적지로 입장하려면 이곳 매표소에서 입장료 11유로를 내야 한다. 해자를 건너면 폼페이를 둘러쌌던 성벽 아래로 아치형의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보행자 통로이고 하나는 폼페이 항에서 폼페이로 물건을 실어 나르던 마차길이다.

2.폼페이 전경.
2.폼페이 전경.

폼페이는 BC 8세기 그리스 식민지 에트루리아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마을을 개척하고 교역을 하다가 BC 5세기경 삼니움인들에게 점령되었는데, 그것은 에투리아인들이 남긴 무덤의 묘비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BC 2세기경 지중해를 지배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주피터 신전과 바실리카 등 로마의 문물이 자리 잡았다. BC 89년 폼페이는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로마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술라에게 함락되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에도 폼페이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포에니 전쟁(Punic Wars: BC 264~ 146) 때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으나 실패하고, 또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시 전쟁(BC 91~88)에 로마에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에 복속되었다. BC 5세기경 삼니움 시대에 쌓은 도시를 에워싼 폼페이 성벽은 한 변이 약2㎞로서 도시에는 7개의 출입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성벽 대부분은 무너진 상태다.

2-1 아폴로 신전.
2-1 아폴로 신전.

마찻길을 걸어서 산위로 올라가니 폭 3m쯤 되는 마찻길은 넓고 큼지막한 바윗돌로 포장(?)되었다. 언덕 위에는 완만한 경사지에 펼쳐진 폼페이 도시는 포격을 맞은 것처럼 건물의 골격들만 셀 수 없이 많이 세워져 있다. 폼페이 시내는 우리가 걸어서 올라온 마찻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법원과 같은 공공시설이 있던 곳이고, 왼편은 의사당, 포럼, 아폴로 신전·베누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 ·도리아식 신전 ·투표장 ·시민회의장 ·시장 ·5개의 목욕탕·극장 ·체육관 · 도량형기 관리소 등 공공시설 유적이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의 아폴론과 아폴론신전 유적으로 폼페이가 BC 5세기에 그리스의 식민도시로서 그 문화가 남아 있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광장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현대 도시계획처럼 질서정연한 바둑판 모양이다. 도시의 외곽인 오른쪽 맨 끄트머리 부근에 로마 콜로세움경기장 같은 원형경기장이 있다.

2-2 도로.
2-2 도로.

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공공건물이나 개인건물은 대부분 2층으로서 천정에 구멍을 뚫어서 채광을 하였으며, 고지대였던 탓에 빗물을 받아서 상수도와 같은 생활용수로 사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폼페이가 융성하던 때는 우리의 고구려(BC 58), 백제(BC 18),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 초기인데, 2천년 전에 도로를 넓은 돌로 포장하고 도로와 약간 높은 인도 사이에는 현대와 같은 하수구시설도 만든 것이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가게 앞에는 우리네 1950~60년대 가게마다 빈지문을 끼워서 가게를 닫던 미닫이 홈이, 그리고 가게의 햇볕을 가리는 차양을 치면서 그 끈을 묶도록 인도의 한쪽 구석에 구멍을 뚫은 것이 우리의 모습과 많이 비슷하다.

2-3 원형경기장.
2-3 원형경기장.

마찻길을 따라 내려가는 왼쪽에는 당시의 홍등가 골목을 알리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새긴 문양이 이채로운데, 홍등가 골목의 집집마다 욕조와 침대는 물론 프레스코화로 그린 춘화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당시의 성 풍속을 엿볼 수 있다. 또, 마찻길에서 갈라진 골목에는 화산폭발이 갑자기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해주듯이 빵을 굽던 화덕이 그대로 남아있는 빵가게며, 술집의 테이블 위에 술잔들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홍등가를 나와서 큰길을 따라 공중목욕탕으로 들어가니, 오늘날의 대중목욕탕 같은 넓은 타원형 욕조가 있다.

3. 홍등가 춘화.
3. 홍등가 춘화.
3-1 빵가게.
3-1 빵가게.

로마인들은 목욕을 좋아해서 곳곳에 공중목욕탕이 발달했으며, 목욕탕에서 정치를 논하고 온갖 거래를 했다고 한다. 인간이 옷을 벗어던진다면 곧 원시인이 되어 윤락이나 매춘 등이 유행하게 되어 목욕탕과 사우나가 발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4-1 캐스트와 유물들.
4-1 캐스트와 유물들.

 

4-2 발굴 토기들.
4-2 발굴 토기들.

그런데, 목욕탕 한쪽 공간에 석고(石膏)로 만든 것 같은 인간 모형 2개가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1860년 폼페이 발굴 당시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교수가 사람이 식사하던 식탁과 숟가락들까지 그대로 남아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화산재를 파헤치던 중 뻥뻥 뚫린 공간이 많이 나오자 그런 틈새가 보일 때마다 반죽한 석고를 부었다가 굳은 뒤 파보니 사람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화산재에 파묻힌 인간이 뜨거운 열기에 숯처럼 타버려 인체의 부피만큼 빈 공간으로서 미라가 아닌 사람 모양의 석고로서 캐스트(Cast)라고 한다. 캐스트는 사람뿐만 아니라 개와 같은 동물도 많이 발굴되었는데, 약80개 정도 발굴된 인간 캐스트 중 목욕탕에서 전시하고 있는 2개 중 비만한 남자는 목욕탕 주인이고, 다른 하나는 목욕하다가 벌거벗은 채 죽은 여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유물은 가까운 나폴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폼페이는 산 위에 있는데다가 커다란 나무도 없어 고작 무너진 건물 그늘에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밖에 없어서 가급적 여름철 여행을 피하거나 양산이나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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