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모습. 자료사진.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모습. 자료사진.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 대통령이 최순실 및 문고리 3인방과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박근혜 정권이 왜 망했는지를 말해주는 가장 상징적인 뉴스다. 대통령은 사고 보고를 받고도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하다가 최순실 의견에 따라 재해대책본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보다 무능한 정권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문고리 정치’의 결과라면,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 MB가 겪는 고초는 ‘형님 정치’의 대가인 셈이다. 박이든 MB든 기존 제도와 정치시스템을 무시하고 정권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은 결과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박 정권의 실세는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이었고 MB 정권의 실세는 ‘형님’과 ‘왕차관’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문고리 정치' 문재인 정권의 '비서실 정치'

MB와 박 정권이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긴 어렵다. 권력은 본래 독점 욕구가 강하다. 자기 혼자 권력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게 권력의 생리다. 권력을 잘못 나누다 보면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후계자도 키우지 않는다. 박정희 YS DJ 모두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고 과거 국왕들조차 왕세자를 일찍 정하는 일을 꺼렸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면 그 많은 권력을 혼자서 다 행사할 방법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위임해서 일 처리를 해야 한다. 권력자들은 자신과 가까운 측근에게만 권력을 나눠주고, 그들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려는 경향이 있다. 측근 정치라 할 수 있다. 인재를 널리 영입해도 쉽지 않은 게 국가 운영인데 측근들만 중용한다면 잘 될 턱이 없다.

문재인 정부도 ‘측근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큰일은 내각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진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UAE와 외교문제가 생기니까 대통령 비서실장이 특사가 되어 날아가고,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도 비서실장이 맡았다. 비서실장과 동급인 통일부장관은 간사로 참석한다. 비서실장은 평창올림픽 때 남한에 온 김여정 일행의 마지막 만찬도 주재했다.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은 내각에서 논의가 이뤄지기도 전에 청와대 민정수석이 발표했다. 한 헌법학자는 내각에서 사전에 심의하고 발표도 정부 대표가 하는 게 맞다고 비판했다. 바른미래당은 청와대 개헌안은 국회도 패싱, 국무회의도 패싱,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청와대뿐이라고 비판한다. 문재인 정부의 ‘비서실 득세’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 비서실은 별도로 꾸려진 '청와대 내각'처럼 보이고 비서실장은 마치 '청와대 총리' 같다.

비서들이 나서는 조직은 비정상

어떤 조직이든 비서실은 파워가 세다. 개인 기업들도 사장실 직원들은 일반부서 직원에 비해 뭔가 달라 보인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공식 직급으론 장관급이지만 파워는 장관과 비할 바 아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직급이 차관급에 불과하나 실권은 장관 이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본무는 어디까지나 비서 일이다. 국가의 최고결정권을 가진 대통령의 정치적 · 정책적 판단을 돕는 일이다.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결정은 기본적으로 대통령 혼자서가 아니라 국무회의를 통해 이뤄지고 국회가 여기에 동의하는 절차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판단을 돕는 게 대통령 비서실의 본래 임무다. 비서들이 직접 ‘실행’까지 나서게 되면 대통령 비서가 장관을 겸직하는 결과가 된다.

사안이 시급하고 중대할 땐 이런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경우 전대협의장 시절 북한과 인연이 있고 국회의원 때는 통일외교통상위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외교장관이나 통일부장관을 대신할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력과 역량만으로 대통령의 특사를 정하고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장을 선출했다면 임 실장보다 좋은 인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임 실장이 특사가 되고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된 것은 그가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서실장의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대통령제에서 비서진의 득세는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역대 정권들도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특히 대통령이 내각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 비서실이 활개를 치게 돼 있다.

나라든 회사든 비서들이 판치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 조직은 비서들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최고 결정권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측근이나 비서들 하고만 얘기해서 실행에 옮기는 방식이어서 위험할 수 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갖추어진 조직과 시스템을 거쳐서 결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국무회의는 구경하고 있고 비서실이 나서는 나라는 비정상이다.

'비서실 정치', 당장은 효과 있을지 몰라도 권력 독점화 우려

아마 모든 대통령이 내각보다는 비서실을 신뢰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만 국민보다는 여당을 믿고, 여당보다는 내각을 믿으며, 내각보다는 청와대 비서실을 믿고, 비서실 중에도 ‘문고리’를 믿는다. 믿는 대상이 대통령과 멀수록 건강하고 능력있는 민주정부라 할 수 있고,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무능하며 독재에 가까워진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어디쯤에 있나? 청와대는 대통령개헌안 발의 과정에서 국회는 물론이고 집권 여당인 민주당까지 소외시켰다. 29일자 중앙언론의 한 칼럼은 “개헌안 공개 때까지 청와대가 민주당과 개헌문제를 협의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내각도 패싱 당하는 판인데 여당과 제대로 협상할 리 없다.

이번 헌법 개정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어떻게 분산시킬 것인가가 핵심 사안 중 하나다. 그런데 현 정부에선 ‘비서실 정치’가 노골화되면서 오히려 권력을 더 집중시키고 있다. 설사 국정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위험한 방법이다. 당장은 외교나 남북문제가 더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도 있으나, 길게 보면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정상 국가가 장관을 둘 이유가 없다. 

중국의 ‘시황제(習皇帝)’로 떠오른 시진핑에서 보듯 권력은 분산보다 독점화 경향이 있다. 기회만 되면 혼자 거머쥐려 한다. 효율성을 명문으로 내세우지만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효율성보다 과정과 절차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강제하는 제도다. 내각보다 청와대 비서실이 앞장서는 정부 운영은 ‘문고리 정치’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바로 그 옆에 위치한 방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운영 방식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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