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

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한 겨울의 수목원은 고요하다. 고요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적막하다. 잎을 다 떨군 채 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들 누렇게 빛이 바랜 채 바스라져 누워 있는 풀들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냥 고적하고 쓸쓸하다. 살을 에는 추위에 찾는 사람조차 드물어 가슴이 시리도록 더 쓸쓸하고 고즈넉하다. 차라리 함박눈이라도 흠뻑 내려 하얗게 덮어 주면 오히려 더 풍요롭고 넉넉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겨울에 수목원을 찾아 거닐다 보면 저절로 철학자가 되어 진다. 마냥 생각에 잠겨 그저 걷는 일 뿐 어느 곳의 무언가에 눈길을 빼앗겨 머뭇거리고 서성댈 일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을 지내다 어느 날 무심히 던진 눈길에 연못가 버들개지가 눈 틔운 모습이 다가선다. 그 때부터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한다. 수목원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봄꽃들의 안부가 궁금해 안달이 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겨우내 볼 수 없었던 꽃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려는 마음에 틈날 때마다 수목원을 누비게 된다. 같은 꽃이라도 서있는 자리에 따라 꽃피는 때가 며칠씩 차이가 나기 일쑤여서, 부지런히 돌아보지 않으면 처음 피는 꽃을 마중하지 못하기가 십상이다. 꽃 마중을 제대로 하려면 매일처럼 곳곳을 돌아보며 살펴야 한다.

한밭수목원의 경우 해마다 봄빛이 따스해 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맨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은 노란 산수유다. 수목원 곳곳에서 노오랗게 피어나 겨우내 지겹도록 변함없던 칙칙한 갈색을 걷어 내주기 시작한다. 산수유가 파란 봄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꽃피우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가 좋다. 긴 겨울이 비로소 걷혀지고 온 천지가 산뜻해지는 느낌이다. 산수유가 피어나면 서원의 숲 속 한 귀퉁이에 숨어 있는 생강나무도 꽃을 피운다. 언뜻 보기에 산수유와 비슷해 따로 눈 맞추어 주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그래도 산수유보다는 몽글몽글한 모습으로 조금 더 맑은 빛의 연노랑 꽃을 피워 산뜻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산수유 생강나무와 함께 서원 남쪽 어름의 수돗가에 있는 영춘화도 꽃을 피운다. 수돗가 뒤로 쌓아 놓은 옹벽 위쪽에 있어서 유심히 찾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영춘화를 만나려 길을 돌아서라도 일부러 그 수돗가를 찾는다.

이즈음 또 눈여겨볼 곳은 서원 정문 들어서 조금 가다가 오른 쪽에 자리한 화단이다. 철마다 갖은 꽃들을 가꾸어 놓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바로 그 화단의 한 구석에서 복수초가 피어난다. 복수초는 눈 속에서도 얼굴을 내밀어 봄의 전령으로 불리는데, 한밭수목원 화단에 피는 복수초는 생각보다 좀 늦게 피는 지라 반가움이 덜 해 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다. 그 복수초 옆에는 낯익은 할미꽃이 무더기로 피어 자리를 한 동안 지켜준다. 어릴 때부터 늘 보아오던 꽃이라 다른 꽃들보다 더 반갑다. 복수초와 할미꽃 사이 화단 모서리 쪽에는 노루귀 푯말이 꽂혀 있다. 그러나 푯말만 서 있을 뿐, 몇 년을 지켜보아도 노루귀 꽃이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 실제로는 심어져 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내가 때를 놓쳤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올 봄에는 모쪼록 그 여린 노루귀 꽃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가장 반가운 봄꽃은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매화다.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피워내는 그 군더더기 없는 단아한 모습, 무엇보다도 잡스럽지 않은 그윽한 향이 좋아서이다. 한 겨울이 지나면 꽃망울을 올리는데, 꽃망울이 맺히고 나서도 지루하게 기다린 뒤 끝에야 매화는 피어난다. 더구나 한밭수목원의 매화는 남녘에 매화가 한창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바심을 내며 한참을 더 기다려야 피기 시작한다. 일단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서둘러 떠날 것처럼 다투어 피어나 마음을 바쁘게 한다. 그 까닭에 3월이 되면 날마다 순례하듯 한밭수목원을 찾아 매화의 동태를 살피며 지낸다. 어떻게든 처음 피는 매화를 놓치지 않고 보려는 욕심에서다. 한밭수목원에서는 동원의 열대식물원 쪽 서원의 연못가 서원 정문 초입의 갈대밭 뒤쪽에 매실나무가 무리지어 심어져 있어 그 세 곳은 빠지지 않고 돌아본다. 그 곳 말고도 몇 군데 따로 서 있는 매화들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매력이 있어 시간 나는 대로 빠짐없이 찾아가 살피노라면 봄날의 아침은 나날이 바쁘다.

몇 년 간 봄이 되면 매화에 취해 날마다 수목원을 돌다 보니 매화라고 다 같은 매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매화 중에서도 유난히 꽃이 예쁜 게 있는가 하면 향이 유달리 그윽하고 좋은 것 전체적인 수형이 그럴 듯해서 먼 데서 바라보는 재미가 더 한 것 등으로 다 제 각각의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한 바퀴를 돌며 안부를 살핀 다음, 그 때 그 때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을 옮겨가며 꽃을 즐긴다. 어느 날은 그윽하면서도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향기를 찾아 어느 날은 예쁘고 단아한 꽃을 찾아 한참을 즐긴다. 또 때로는 큰 둥치의 매실나무를 찾아 매화 꽃그늘 속에 파묻혀 푸른 봄하늘을 넋 놓고 올려다보며 한참을 쉬다 나오는 호사를 누려 보기도 한다.

그렇게 매화를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봄이 무르익어 목련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등등의 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이때가 한밭수목원을 찾는 재미가 한결 더 쏠쏠해지기 시작할 때다. 이 무렵부터 초겨울이 될 때까지 이를테면 마지막 가을 꽃 구절초가 다 지고 꽃대궁이 말라 고개가 꺾어질 무렵까지 철마다 피고 지는 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게끔 재미지다. 이 기간 중에는 틈 날 때마다 수목원을 찾게 된다. 이제 시작된 한밭수목원의 봄, 올 한 해도 수목원의 철따라 변하는 풍경을 둘러 볼 일이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진다.

이 봄 한밭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운 매화는, 동원 연못 북쪽 언덕 기슭에 있는 수양매다. 다른 꽃들이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 할 즈음 딱 한 송이를 피워내어 가장 먼저 그윽한 향을 선물해 주었다. 기대하지 않고 둘러보다가 가지 틈에서 숨어있듯 피어있는 꽃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달랑 한 송이만 피어있는 매화가 너무도 애처롭게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자리를 떴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