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은 관계에 있어서 ‘참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쉽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기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의 질문은 “나는 누구의 사람인가”라는 관계성에 대한 물음으로 생각해 봐도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도 다 알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존재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인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다 보면 더 크고 깊은 섭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자기 이해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명상을 해봅니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뭘까 눈을 감고 수많은 날들 속에서 아픔과 견뎌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항상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던 자신, 항상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자신 안에서 ‘나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함’을 깨달았을 때, 그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 용서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신 만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치 그 신념이 자신의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지배할 만큼 중요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좋은 관계도 맺기도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념이나 틀이 ‘자기’ 라고 믿게 됩니다.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 마치 유리잔이 깨진 것과 같은 수많은 파편들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진정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피하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봐야 합니다. 도망가려하지 말고 봐야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파서 우는데, 엄마가 바쁘다고 밥을 주지 않고 엄마 일만 하고 있을 때 그 아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는 배가 부르다. 진짜 배가 부르네’ . 배고픈 자신을 죽이고, ‘배가 부르다’ 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가상의 세계 속에 있을 때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자기’ 인 냥 살아가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과 갈등을 갖게 되면서 파편화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것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얼마나 치욕적이며, 쓰라린 아픔, 소리내지 못하고 꺽꺽대는 울음과 같은 통증입니다. 아프지만 과감히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자기를 보게 되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면서 진정한 자기용서를 하게 됩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회개모델(mentanoia model)’ 은 사람들이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들이 그 상황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그들을 목회적 돌봄을 통해서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다 라는 초점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회개모델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는 일은 자기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힘든 과정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와의 관계, 즉 대상하고의 관계입니다.
대상관계이론의 창시자 멜라니 클라인 학자는 ‘엄마의 젖가슴’과의 관계에서 차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서술했습니다. 클라인의 영향을 받은 도널드 우즈 위니캇은 ‘holding mother(안아주는 어머니)’ 품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와 새로운 차원의 관계경험으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위니캇이 말한 ‘Good enough mother(충분히 좋은 엄마)’는 엄마와의 모든 경험을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인격의 근원적인 재탄생은 엄마와 아이와의 상호관계를 통해 통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을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둘로 나뉘어버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기를 용서하는 과정에서 자신 안에서 이렇게 둘로 나뉘어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진실로 묻고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분대상을 전체로 봄으로써 많은 오류를 범하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용서란 자신이 잘못이나 실패를 했을 때 경험하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 행동을 스스로에 대한 연민, 너그러움, 자신에 대한 사랑 등 긍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자기용서는 자신이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보상을 하거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향후에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조건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용서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상대방의 행동 변화를 전제하지 않고 용서를 베푼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용서는 자신의 내적 수준에 따라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용서는 우리의 내면을 놀랍도록 성장하게 해줍니다. 한 예로, 자기 안에 시기심을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좋은 사람이라고만 살았던 사람이 자신의 시기심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질투와 시기심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질투는 자신이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구이고, 시기심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시기심은 비교할 수 없는 공격성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그럽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 안에서 시기심이 있음을 알았을 때, 그것이 마치 유리잔을 바닥에 깨트렸을 때 깨진 조각들처럼 마음의 거울이 파편화됨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용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식하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수용하고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책감과 후회를 인지적, 감정적으로 다루는 과정이 없는 자기용서는 거짓용서, 즉 합리화, 억제, 부인, 자기기만 등을 이끌게 됩니다. 참된 자기용서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자기수용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존중의 회복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용서는 자신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과 느낌을 회피하거나 없애려는 동기에 의해서 나타나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과 자기 처벌적인 행동을 줄여나가는 것이며, 자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이 되며, 자기를 진정 사랑하게 되는 길잡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