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권선택 전 대전시장(왼쪽)과 이재관 대전시장 권한대행. 자료사진.
권선택 전 대전시장(왼쪽)과 이재관 대전시장 권한대행. 자료사진.

임금이 나이나 건강 등의 이유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면 상왕(上王)이 된다.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정사를 좌지우지하면 이른바 ‘상왕 정치’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행정이 이뤄지면 ‘상왕 행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대전시에선 상왕 행정이 펼쳐지고 있다.

전임시장이 물러난 자리를 이재관 시장권한대행이 대신하고 있으나 전임시장의 정책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변화가 없다는 것만으로 상왕행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책을 바꿀 만한 이유가 없는 데도 일부러 바꾼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러나 지금 권한대행이 계승하고 있는 주요 정책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임이 밀어붙이던 호수공원사업, 월평공원특례사업, 2호선 트램 등은 강한 반발에 부딪혀 있거나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부는 추진 과정의 불법성도 문제가 된 사업이다. 그런데도 후임 책임자가 이런 사업들까지 전임자와 똑같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논란이 큰 사업은 조직의 수장(首長)이 바뀌면 최소한 재검토 과정을 거쳐 계속하든 수정하든 하는 게 정상이다.

대전시정을 대하는 권한대행의 자세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안 보인다. ‘권한대행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어렵다. 그는 오히려 전임자의 정책을 전임자보다 더 열심히 밀어부친다. 트램에 대한 정부의 타당성조사 재결정이 통보되면서 사업 차질이 우려되자, 권한대행은 “트램을 정치쟁점화하지 말라”며 정치권에 훈계까지 한다. 트램 견학을 정례화시키고, 호수공원사업과 월평공원 특례사업에 대해서도 한 치의 양보가 없다. 

권한대행 입에서 나오는 ‘시민행복과 살맛나는 대전’

권한대행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얼굴을 가리고 듣는다면 전임시장의 말로 착각할 정도다. 권한대행은 지난해 송년사에서 “시민이 행복하고 살맛나는 대전의 미래 100년을 위한 ~~~ 과제가 하나하나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고 했다. 신문 인터뷰 때도 ‘다 함께 행복한 대전’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시민을 행복하게 대전을 살맛나게’는 전임의 시정구호였다. 시내 곳곳에는 이 구호가 아직도 내걸려 있다. 전에는 다른 플래카드에 가려져 있었으나 요즘은 이 구호만 남아 더 돋보인다. 

전임시장의 자취는 그가 물러난 뒤 더 드러나고 돋보이고 있다. 대전시정을 홍보하는 LED 전광판에는 트램이 시원하게 달리는 홍보영상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소통과 경청’이란 전임의 선거구호까지 전광판에 나오는 장면도 보였다. 아무리 권한대행 행정이라고 해도 재판받고 물러난 시장이 출마할 때 쓰던 선거구호까지 전광판에 틀어주는 곳이 있을까?

대전시 행정은 전임시장의 사업과 정책은 물론 구호와 정신까지 이어받고 있는 ‘완벽한 상왕 행정’이다. 권한대행이 열과 성을 바쳐 전임을 떠받드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임-후임이 부자(父子) 사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대전시는 마치 전임시장이 얼굴만 다른 사람으로 바꿔 시장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다. 

어떤 조직이든 수장이 바뀌면 전임자의 정책이나 관행에 변화를 줘보고 싶어한다. 그것으로 조직의 분위기도 쇄신하고 후임자 자신의 존재감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전임자의 멀쩡한 정책까지 뒤집고 전임자의 비리를 들춰내는 데 힘을 쏟기도 한다. 대개는 이런 ‘후임자 본능’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상왕행정 자체는 미덕에 가깝다.

상왕 행정은 ‘복마전 행정’ 계속하겠다는 것

대전시의 상왕행정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다. 현재 대전시는 전체가 마치 복마전처럼 되어 있다. 대전시 산하기관들의 인사비리 의혹이 줄지어 터지고 있고, 수 천억 원대 유성복합터미널 사업은 또다시 의혹덩어리로 불거지면서 감사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대전시와 산하기관 곳곳에선 썩은 내가 진동한다. 시공무원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상왕의 책임이 작지 않을 것이다. 상왕을 계승할 수 없고 계승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현상들이다.

권한대행이 상왕 덕에 그 자리에 앉았으니 상왕의 뜻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입장임은 이해한다. 그러나 오직 상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자세로 권한대행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상왕의 하수인이요 충복에 불과할 뿐이다. ‘시장 노릇’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귀중한 기회를 사사로운 ‘보은 행정’에만 허비한다면 권한대행을 하는 보람이 무엇인가?

대전시는 아직도 전임시장의 수중에 있는 게 분명하다. 사업도 인사도 그의 손에 있을 것이다. 말은 분명 권한대행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로되 물러난 시장의 말과 한 치도 다를 바 없고,  물러난 시장의 시정구호가 대로마다 아직도 큼직하게 내걸려 있으며, 그 시장의 4년 전 선거구호까지 시정홍보 TV에서 돌아간다. 상왕이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당장 ‘상왕 행정’을 막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시민들은 이런 분이 지금 150만 대전시 앞날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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