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52]

1. 아우슈비츠 지도.
1. 아우슈비츠 지도.

‘폴란드’라고 하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가 수백만 유태인을 강제수용하고 대량 학살한 ‘아우슈비츠(Auschwitz) 포로수용소’일 것이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300㎞, 그리고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61km 떨어진 인구 4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 오스비에침(Oswiecim)인데, 아우슈비츠란 폴란드 도시 오스비에침의 독일식 지명이다. 비수아 강과 소우아 강의 합류지점인 오스비에침은 지리적으로 독일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중부유럽에서 교통의 중심지여서 2차 대전 발발 직후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이 유럽 각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을 한 곳에 모으기에 매우 적합한 도시였다.

1-1 포로수용소 정문
1-1 포로수용소 정문

크라쿠프에서 오스비에침까지는 기차와 버스가 운행되지만, 기차 편은 매우 드물어서 대개 30분마다 출발하는 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크라쿠프 기차역 뒤편의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약1시간 반가량 걸리는데, 버스 티켓은 버스터미널 옆의 여행사에서 사거나 버스를 탄 뒤 운전기사에게 직접 지불해도 되지만, 여행사에서 구입하는 것이 좋다. 요금은 편도 10주어티(한화 약 3000원)정도이고, 관광객들이 갑자기 우르르 내리는 정거장이 바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의 정문이다.

2-2 끌려온 유태인들(전시된 사진).
2-2 끌려온 유태인들(전시된 사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입구에는 이곳이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고, ‘노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독일어 ‘ARBEIT MACHT FREE’라는 문구가 아치형으로 걸려있는 수용소 정문을 들어서면 한눈에 군부대 막사인 것을 알 수 있는 철조망 울타리가 있다. 수용소 입장은 무료이고, 패키지여행이 아닌 경우에는 수용소 안의 서점에서 한글안내서를 구입한 뒤 안내서를 펼쳐서 직접 둘러봐도 된다(한글안내서 3주어티/900원).

2-3 앙상한 포로 모습(전시된 사진).
2-3 앙상한 포로 모습(전시된 사진).

붉은 벽돌로 지은 28동의 수용소는 3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대부분의 수용소가 그러하듯 가로세로로 반듯하게 세운 수용소 안에 다시 이중 철조망 울타리를 치고, 군데군데 높다란 감시초소가 있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유태인 정치범들을 수용하다가 점점 그 범위를 확대했는데, 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1940년 이곳에서 약3㎞쯤 떨어진 곳에 이곳보다 10배나 큰 제2수용소인 브레진카(독일식으로는 바르케나우)를 지어서 수백 만 유태인을 수용했다. 현재 박물관과 전시실로 이용하고 있는 수용소 건물마다 일일이 번호를 붙여 놓았는데, 수용소와 약간 떨어진 건물에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시체를 불 태웠던 소각장이 있다. 특히 수용소 내에서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또다시 전류가 흐르는 이중 철조망을 한 막사는 아마도 중죄수(?)들을 가둔 수용소였던 것 같다.

3. 수용소 막사.
3. 수용소 막사.
3-1 포로구분 표시.
3-1 포로구분 표지.

당시 유태인들이 수용되었던 건물들은 전시관이 되어 수용자들의 비참했던 모습을 알 수 있는 숙소와 화장실 시설, 그리고 나치 독일군이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태우고 왔던 열차와 사진자료들을 빽빽하게 전시하고 있다. 특히 수용자들이 입었던 환자복 비슷한 옷깃에는 출신 성분을 표시하는 마크가 부착된 모습이 눈길을 끌었는데, 이들이 무슨 죄로 끌려와서 이처럼 짐승처럼 인간도살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일까?

3-2 의수족들.
3-2 의수족들.

이어지는 수용소마다 유대인들이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가지고 왔던 식기, 커피포트, 주전자 등의 생활도구는 물론 그들을 처형하고 미처 소각하지 못했던 신발, 가방 등을 산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특히 노동력이 없는 장애자들에게 소독과 목욕을 시킨다며 의․수족들을 탈착시킨 뒤 즉시 가스실에서 죽이면서 남겨진 산더미 같은 의수족들, 그리고 처형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모아서 군용 카펫의 재료로 삼고 신체의 일부로 비누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마치 소나 돼지처럼 살육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처형한 뒤 남은 머리카락들이 수용소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용소에서도 머리카락을 수북하게 쌓아둔 곳은 너무 참혹하다고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3-3 부녀자들 그릇.
3-3 부녀자들 그릇.

사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여년이 지나도록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나 연구가 없어서 학살 원인과 학살된 유대인 숫자에 관해서는 통계마다 큰 차이가 있는데, 나치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와 다른 주장도 있다. 즉,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히틀러가 1차 세계대전의 패전 책임을 유대인의 비협조로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과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이 히틀러를 더욱 비난하기 위한 음모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3-4 남자 신발들.
3-4 남자 신발들.

먼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 때문이 아니라 2차 대전 발발 후 독일 내 유태인들의 반역행위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독일은 2차 대전 이전까지 유대인에게 관대했으며, 오히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박해가 더 심해서 유태인들은 독일로 많이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독일의 상권뿐만 아니라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 등 독일사회 전 분야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회와 화합하지 못해서 독일인들의 반감을 샀는데, 특히 2차 대전이 벌어지자 유태인들은 독일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으며, 일부는 연합군과 내통하여 독일 중요지역에 대한 폭격을 유도하는 등 반역행위를 했다고 한다.

3-5 유태인들의 생활도구들.
3-5 유태인들의 생활도구들.

또,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에 적합하지 않는 노약자나 장애인들은 목욕을 시켜준다며 곧장 가스실로 보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당시 연합국의 무차별 폭격과 전쟁으로 장티푸스가 크게 유행해서 그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매장이 아닌 소각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히틀러가 비생산적이라며 정신병자,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 등 피살자 27만여 명 중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히틀러의 6촌 여동생도 있을 정도여서 반드시 민족우월주의에서 유태인만을 학살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4. 시체 소각로.
4. 시체 소각로.
4-1 가스실 조감도.
4-1 가스실 조감도.

둘째. 유대인 1500만 명 학살이라는 숫자는 리쿠에 신부의 기록과 프랑스의 라루스 백과사전(Grand Larousse Encyclopedique)의 2천만 명 학살기록에 의한 것이지만, 2천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전 세계에서 살고 있던 유태인 숫자보다 많다며 이를 부인하는 견해가 많다. 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400㎡ 크기의 독가스 실에 한번에 3천 명씩 처넣어 하루에 24000명을 죽였다는 계산이 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라고 한다. 또, 독가스 실에서 유태인을 죽인 치클론 B가스는 점화성과 점착성이 강해서 살포 후 24시간이 지나야 가능한데도 독일군이 가스 중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처형 후 아직 인분이 흐르고 피범벅이 된 사체에서 금이빨과 보석들을 뽑아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는 가스실과 소각로는 2차 대전이 끝난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처형된 숫자의 차이는 둘째 치고 나치가 유태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엄연한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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