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인명사고 난 서구 아파트..단지 내 도로는 사유지
누가 봐도 도로, 법적으론 다른 공간
12대 중과실 포함 안 돼 가해자 처벌 어려워

지난해 10월 대전 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걷던 여아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여 숨을 거뒀다. 당시 사고 현장. / 사진=이주현 기자

최근 아파트단지내에서 교통사고가 잇따르면서 도로교통법 개정 여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도로는 사유지여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도로교통법 12대 중과실에 포함되지 않아 현행법으로는 가해자 처벌이 어렵다. 이러는 사이 하소연할 곳 없는 교통사고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도로교통법상 12대 중과실은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제한속도보다 20km 과속 △앞지르기 방법 위반 △철길 건널목 통과방법 위반 △횡단보도 사고 △무면허 운전 △음주운전 △보도 침범 △승객 추락방지 의무 위반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운전 의무 위반 △화물 고정 조치 위반(신설조항) 등 가해자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사고사례다. 아파트 단지내 교통사고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다. 사각지대다.

지난해 대전에서 실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0월 대전 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사건 발생 이후 3개월이 지난 23일 오전 9시 30분쯤 대전 서구의 한 아파트. <디트뉴스> 취재진이 정문에 들어서자 하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많은 위로와 따뜻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껌딱지 엄마‧아빠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지난해 10월 이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걷던 여아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여 억울하게 숨을 거두자 곳곳에서 보낸 추모와 애도에 대한 아이 부모의 대답이었다. 딱딱한 텍스트 속에서 아이 부모가 멈추지 않는 슬픔을 꾹 참으며 울먹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사고 현장은 현수막이 걸린 바로 앞 횡단보도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주위는 며칠 전만해도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파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고가 났던 횡단보도와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추모제가 열렸던 단지 광장 분수대 앞에는 사람들이 놓고 간 꽃과 간식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현수막 외에는 모두 치운 상태다.

사고 현장을 둘러봤다. 누가 봐도 하얀 선은 횡단보도고 표시도 잘 돼 있었다. 과속방지턱 설치도 양호했다. 그 옆은 차선이 그어져 있는 도로였다. 그런데 이곳이 도로교통법상 도로가 아니라고 한다.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사유지여서다. 아파트 단지처럼 출입 차단기 등으로 차량 출입을 통제하면 특정한 주민들만 이용하게 되는 비공개된 장소이기 때문에 도로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대전지방경찰청에 따르면 교통사고 발생 시 가해자는 도로교통법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른 중과실이 적용되지만 이 경우 이런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사유지로 구분돼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서다.

법 테두리에 없으니 당연히 경찰의 단속과 처벌이 어렵다. 이 아파트의 경우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출입 차단기, 경비원 등이 없기 때문에 교통사고 통계는 잡히지만 가해자에게 행정‧사법적 처벌은 적용하기 어렵다. 이 말은 반대로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할 피해자가 두 번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파트 주민 A씨는 “횡단보도가 다 같은 횡단보도인줄 알지 누가 다르다고 생각하겠느냐”며 “어느 곳보다 안전해야 할 아파트 단지가 주민들과 차량이 서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안전 사각지대인줄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최근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걷던 여아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여 억울하게 숨을 거두자 곳곳에서 보낸 추모와 애도에 대해 아이 부모가 고마운 마음을 현수막에 담았다. / 사진=이주현 기자

유가족들은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도 도로교통법 12대 중과실에 적용되도록 법이 개정돼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가족은 <디트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며 “도로교통법의 허점을 알리고 이를 바로 잡아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119구급대원과 소방관 부부라고 밝힌 유가족은 지난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가해자의 만행과 도로교통법의 허점에 대한 개선 요구를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23일 오후 1시 기준 12만 6088명이 동의했다. 동의자가 20만 명이 넘으면 청와대가 직접 답변하게 된다.

앞서 호소문을 통해서는 “가해자 차량 블랙박스를 확인해보니 차가 바로 정지하지 않고 더 이동해 아이가 죽음에 이르게 됐다”며 “가해자는 사고 며칠 후 비행기를 타고 가족여행을 갈 정도로 상식밖의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해자가 재판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최대한 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으로 저희를 기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해자는 잘못된 법을 악용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사유지 횡단보도라는 이유로 도로교통법 12대 중과실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며 “아이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아파트임에도 사유지 횡단보도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다시 똑같은 사건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도로교통공단의 한 교수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로교통법 개정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도로교통법상 도로의 개념을 도로뿐만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같이 다중 밀집 지역은 도로로 간주하는 쪽으로 개정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국민적인 관심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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