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53-

소금광산 매표소.
소금광산 매표소.

폴란드 남부의 도시 크라쿠프(Krakőw; 독일어 Krakow)는 1572년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1138년부터 약500년 동안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는데, 2차 대전 중에도 도시가 피해를 입지 않아서 1978년 UNESCO 최초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크라쿠프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15㎞ 떨어진 비알리츠카(Wieliczka)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알려진 유배지였으나, 1290년 이곳에서 소금이 발견되면서 폴란드 왕국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소금광산 깊이 표지.
소금광산 깊이 표지.

중세에는 소금(Salt)을 오늘날 황금처럼 중요시하여 ‘회색의 금’이라고 했으며, 소금 1㎏이 은 1㎏이나 금 500g과 교환될 정도였고, 소금으로 근로자의 임금을 지급해서 소금(Salt)은 오늘날 ‘월급(Salary)’이란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북유럽에서는 소금광산을 가진 지역은 모두 부유한 도시여서 지명에 소금(Salt)을 붙인 도시가 많이 생겼다(예: 잘츠부르크(Salzburg). 14세기 폴란드에서도 카시미르 왕은 소금광산을 국유로 하고 심복에게 소금광산을 맡길 정도였는데, 폴란드의 전성기인 야기엘로 왕조 때에는 국가재정의 1/3이 소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소금광산 터널.
소금광산 터널.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은 200만 년 전에는 바다였으나 지각변동으로 바닷물이 증발하고 남은 소금이 암염으로 변해서 소금 광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10㎞에 걸쳐 500m~1.5km 두께로 뻗쳐 있다. 그러나 1978년 유네스코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소금생산을 중지하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는 관광지로 변했는데, 연간 약100만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크라쿠프 중앙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304번 시내버스를 타면 비알리츠카 소금광산까지 약30분정도 걸리는데, 버스정류장 바로 옆의 길쭉한 단층건물이 소금광산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이다. 입장료 84즈위터(약25000원)를 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의 정원 건너편에 소금광산으로 내려가는 작은 막사가 있고, 그 오른편에 우물처럼 약간 볼록 솟아난 곳에 철망 그물을 덮어 놓은 곳은 지하 소금광산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기구이다.

소금운반 궤도.
소금운반 궤도.

소금 광산은 모두 9개 층으로서 최고 깊이는 지하 340m이며, 180여 개의 갱도에 약2,040개의 채굴했던 방이 있다고 한다. 갱도의 길이는 모두 약300㎞에 이르지만 일반인에게는 지하 약64m 지점인 1단계~3단계 구간만 공개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은 약3㎞에 걸쳐 28개의 방을 볼 수 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1단계 구간만 내려가면 기온은 섭씨 15~6도로서 약간 춥게 느껴질 정도이다.

소금채굴 장비.
소금채굴 장비.

소금광산에서는 소금에서 발생하는 매탄가스의 일종인 초산가스 때문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데, 특히 1644년에 일어난 화재가 몇 개월 동안 계속되면서 광부들과 말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메탄은 독성이 없고 무색무취하지만, 공기와 접촉하면 폭발해서 소금광산 안에서는 성냥이나 라이터 등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광산 내부는 항상 14도 정도를 유지하도록 6단계 243m 지점에 공기순환 장치를 설치해서 관광객들이 이동하는 통로에도 순환되는 바람이 매우 거세서 중간 중간에 바람을 차단하는 목제 대문을 만들어 두었다. 또, 관광객들이 안내 코스가 아닌 소금동굴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관광객 일행의 앞뒤로 현지 가이드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소금채굴 모형.
소금채굴 모형.

소금광산의 넓은 통로에는 소금을 채굴하여 운반하던 객차의 레일이 놓여 있고, 막장에서 채굴한 소금을 레일이 놓인 객차까지는 말이 이끄는 마차로 실어 날랐다. 말은 어려서 광산으로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일만 해서 밝은 빛을 볼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컹가 교회.
컹가 교회.

일반적으로 폐광에는 채굴하던 광물이나 채굴장비 등을 전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은 소금을 채굴한 넓은 공간에 소금광산과 관련 있는 수많은 전설의 동상과 인물들, 심지어 일반 교회만큼 넓은 예배당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광부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광산에서 작업하면서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소금을 채굴한 공터에 성당을 만들기로 하고, 1896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광부 '요셉 마르코브스키(Markowski)'와 그의 동생 ‘토마스 마르코브스키’ 형제에게 맡겼다. 두 형제는 지하 101m 지점에 길이 54m, 폭 17m, 높이 10~12m의 ‘성 킹카 교회’를 만들었는데, 킹카 교회란 소금광산의 수호신 킹카 공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결혼식, 음악 연주회는 물론 폴란드의 미인선발대회장으로도 이용되며, 국내외에 소금광산을 널리 홍보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소금광산에는 킹카교회 이외에 성 요셉교회와 성 안토니 교회 등 2개의 교회가 더 있다.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전설의 방’ 중 5번방은 헝가리 국왕 벨레 4세(Béla1 Ⅳ: 1206~1270)의 딸 킹카 공주가 ‘마라무레’ 소금광산을 발견하여 ‘소금광산의 수호신’이 된 것을 기념하여 암염으로 조각한 것이다. 1235년 29세의 벨레 4세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여 헝가리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킹카 공주가 폴란드 크라쿠프의 브레슬라우 공작과 혼인할 때 지참금으로 소금광산을 주었는데, 킹카 공주가 이곳에서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약혼반지를 던지자 수십 개의 소금덩어리와 함께 공주가 던졌던 반지도 다시 나와서 소금광산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1967년 킹카 공주와 벨레 4세를 암염으로 인물상을 조각했다(벨라 4세에 관하여는 2017. 10.06. 헝가리 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성당 참조).

킹가 공주.
킹가 공주.

또, 위대한 조각 ‘3번 방’은 1493년 크라쿠프 야기에오대학에 재학 중이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이곳에 여행 온 것을 기념하여 그의 탄생 500주년을 맞은 1973년 둥근 지구본을 들고 있는 동상을 세웠다(코페르니쿠스에 관하여는 2018.01.01. 바르샤바 참조). 그러나 소금광산에서 최고 걸작은 1935년 안톤 비로데크가 암염에 조각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인데, 비로테크는 암염 20㎝ 두께에 최후의 만찬을 정교하게 새겼다.

벨라 4세.
벨라 4세.
교황 바오로 2세.
교황 바오로 2세.

그밖에도 암염의 치유효과가 널리 알려지면서 1964년 지하 211m 지점에 호흡기 질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었으며, 지하 130m 지점에는 광산의 채굴 역사, 기술 발전사, 채굴 도구와 기계, 광산지도 등을 볼 수 있는 소금박물관도 만들었다. 소금광산으로 내려갈 때에는 나무계단으로 걸어서 가지만, 소금광산을 둘러본 뒤 올라올 적에는 초고속 승강기를 타고 쉽게 올라온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