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2] 확 바뀐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2016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왼쪽)과 2018년 1월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2016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왼쪽)과 2018년 1월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열혈독자 노호룡 씨 제공.

#장면 하나.

2016년 1월 13일 청와대 춘추관 2층 브리핑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30분 동안 신년사를 읽었습니다. 이어 기자회견을 겸한 일문일답을 했습니다. 사회자는 정연국 대변인이었고요.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13명의 기자가 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시간은 대략 1시간이 걸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답이 끝날 때마다 대변인이 “질문을 원하는 기자는 손을 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여럿의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고, 대변인은 주저 없이 다음 기자를 호명했습니다.

MBC뉴스 앵커 출신인 정 대변인은 2015년 10월 25일 임명됐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업무는 11월부터나 가능했을 텐데요. 두 달 여 만에 기자들 얼굴과 이름, 언론사명을 어찌나 정확히 익혔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거 연출 아냐’는 촉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손을 계속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불리지 않았고, 대전일보 기자를 마지막으로 일문일답은 끝났습니다. 무언가 모를 감정과 기분이 교차하며 순간 숨이 콱 막히더군요. ‘아, 나는 들러리였나’ 싶었습니다.

정 대변인은 회견 하루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전에 질문 내용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질문 순서와 내용도 전혀 모른다고 자신 있게 말했죠. 그렇지만 막상 회견 당일 SNS에는 각 언론사 질문 순서와 요지가 정리된 문건이 돌았고, 기자회견에서 사실로 입증됐습니다.

‘짜고 친 고스톱’이었던 것이지요. 질문순서를 다 알고 있으면서 손은 왜 들라고 했을까요. 또 손을 들란다고 든 기자들은 무슨 경우인가요. “제가 머리가 좋으니까 여러 질문을 다 기억한다”는 대통령 말도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했습니다. 다른 장소도 아닌 청와대에서, 그것도 국가수반과 언론이 국민들을 대놓고 ‘속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작년에는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면서 신년기자회견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익히 아는 것처럼 새해 첫날, 그것도 20분 전, 기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기자간담회를 했었죠. 그리고 기자들은 두 손 공손히 모으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 했습니다.

각본없는 기자회견이라며 국민을 속인 채 진행했던 2016년 박 전 대통령 기자회견 모습. 자료사진.
각본없는 기자회견이라며 국민을 속인 채 진행했던 2016년 박 전 대통령 기자회견 모습. 자료사진.

#장면 둘.

2018년 1월 10일 청와대. 다들 듣고 보셨다시피 문재인 대통령 취임 첫 신년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신년사와 기자회견 순서는 2년 전과 큰 차이는 없었고요. 다만 2년 전에는 춘추관(기자실)이던 장소가 영빈관으로 바뀌었죠. 사회자는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고요. 딱딱하고 무거웠던 과거와 달리 달달한 노래도 나오고, 회견장 밖에는 다과까지 차려졌습니다. 기자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청와대 배려가 느껴졌던 장면입니다.

이어진 질문시간. 정해진 각본 없이 대통령이 직접 지명한 기자가 묻고 대통령이 답했습니다. 2년 전 “각본은 없다”던 대통령의 거짓말과 달리, 2018년 문재인표 기자회견은 진짜 ‘날 것 그대로’였습니다.

신년 기자회견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시작했답니다. 당시에도 각본이 있었고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도 각본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언론을 통하는 회견 대신 직접 국민과 대면해 뜻을 전하는 ‘국민과의 대화’를 택했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처음으로 미국 백악관 형식을 도입한 걸로 들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이나 회견을 꺼려 신년 기자회견을 아예 없앴다죠. 연초 청와대 참모들을 앉혀놓고 일방적인 국정연설로 대신 했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앞서 설명대로 ‘불통의 여왕’이었지요. 참고로 박 대통령은 1987년 직선제 실시 후 당선된 대통령 중 취임 첫 해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란 ‘대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기자들이 사전 각본 없이 대통령과 눈을 맞추며 ‘자유롭게’ 질문하고, 대통령이 직접 질문할 기자를 고르는데 자그마치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이만하면 ‘역사적 사건’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짜여진 각본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기자가 묻고, 대통령이 질문할 기자를 직접 지목해 답한 문 대통령 취임 첫 신년기자회견 모습.
짜여진 각본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기자가 묻고, 대통령이 질문할 기자를 직접 지목해 답한 문 대통령 취임 첫 신년기자회견 모습. 청와대 페이스북.

그날, 200명이 넘는 기자들 가운데 17명이 질문 했는데요. 용케도 제가 4번째로 질문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찌 보면 2년 전 한(恨)을 푼 셈이지요. 지목을 받으려고 몇날며칠 궁리 했습니다. 남들처럼 손을 든다면 확률이 떨어질 테니까요. 회견 전날, A4용지 두 장 크기인 A3용지를 샀습니다. ‘충청 대표 디트뉴스, 대통령께 질문 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지, 후회 없이 시도나 해보자’는 심정이었죠.

그럴싸한 질문도 필요했습니다. 명색이 ‘충청 대표’인데, 대통령 앞에서, 더구나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준비한 질문이 바로 ‘지방분권’입니다. ‘개헌’에 대한 질문을 할까도 생각했는데요. 그것은 보다 광의의 개념이라 범주를 ‘지방’으로 집약했습니다. 인구 79만 명의 일본의 작은 지자체 ‘후쿠이현’이 일구어낸 기적 같은 자력갱생 생존모델을 탐구한 심층 리포트 <이토록 멋진 마을>(후지요시 마사하루 지음, 2016)을 사 읽고요. '지방소멸'과 '지방재생'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시사주간지도 보며 공부했습니다.

지방 언론사에도 중앙 언론사 못지않게 똑 부러지게 질문할 수 있는 기자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대통령도 응답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 ‘안나피 필드’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요 언론사 외 지방지에도 발언 기회가 할당된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기자회견이다. 이전 정부와도 다르고 미국 백악관과도 다르다.’

어느 독자께서는 제 기사 ‘지방분권, 디트가 묻고 대통령이 답하다’에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지역 언론이 살아야 진정한 지방분권이 될 수 있고 지방이 살아납니다. 지역 언론들 분발하세요.’

방송의 힘은 굉장했습니다. 오랜 시간 감감무소식이던 꼬맹이 시절 친구 녀석들이 “잘 봤다”며 연락해 오더군요. 전화와 문자메시지, ‘카톡’과 ‘페북’을 통해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글로나마 고마움을 대신 전합니다. 오늘도 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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