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50>

1. 플란드 지도.
우리에게 폴란드(Poland)는 동유럽의 공산국가로 기억하지만, 조금 더 생각한다면 ‘피아노의 시인’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나라이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인(Marie Curie: 1867~1934)을 낳은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동서 유럽 사이이자 발트 해에서 남유럽으로 통하는 교차지역에 위치한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간의 문화충돌로 전쟁을 많이 겪고, 수많은 외침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가 회복하는 등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의 쓰라린 역사와 비슷한 나라다. 즉, 1772년 가톨릭교도와 그리스정교도간 종교분쟁(제1차 분할)으로 러시아(폴란드 북동부)· 오스트리아(남부 갈리치아 지방)· 프로이센(북서부의 폴란드령 포메른 지역과 에르멜란트 지방)등으로 분할되었다가 1793년 제2차 분할로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또다시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1795년 제3차 분할로 폴란드는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폴란드는 1차 대전 후인 1918년에 비로소 독립을 했지만, 몇 년 후 2차 대전이 벌어지자 1939년 9월 또다시 서부는 독일, 동부는 소련에게 각각 분할 점령되었다가 1941년 독일이 폴란드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처형되었는데, 그중 약300만 명이 유대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대학살이다. 
1-1 바르샤바의 교통로.

2차 대전 후 폴란드는 구소련의 영향으로 공산당정권이 수립되고 1956년 6월 포즈난 등 수많은 반소(反蘇)운동과 자유화운동이 벌어졌으나, 모두 실패하다가 1989년 4월 민주화 바람으로 자유노조가 주축이 된 비공산당 연립정부가 탄생했다. 1991년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2004년 EU 회원국이 되었다. 2016년 말 현재 인구는 약3850만 명으로서 97% 이상이 슬라브족이지만, 다른 슬라브 국가들이 그리스정교(러시아정교)를 믿는 것과 달리 가톨릭신자가 95%이다. 보수적인 폴란드는 아직까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고 폴란드화 (PLN)만 사용하는데, 1즈위터(zl)는 우리 돈 약320원 정도이다.  
2. 바르사뱌 전경.

비스와 강(Vistula River) 사이에 형성된 도시 수도 바르샤바(Warsaw)는 1596년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고, 1807년~1815년에는 바르샤바데 공국, 1815년부터는 바르샤바 왕국의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로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복원되어 1980년 도시 전체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르샤바까지 아시아에서는 북경․도쿄 노선만 있었으나, 2016년부터 인천에서도 주5회 직항노선이 취항하여 폴란드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등 다른 동구권국가 여행에 크게 편리해졌다 바르샤바 국제공항은 2001년 음악가 쇼팽의 이름을 덧붙인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라고 개칭했으며, 공항에서 175번 시내버스가 바르샤바 중앙역까지 약35분 걸리며, 공항철도를 타면 3개 노선 모두 시내를 통과하면서 약20분 걸린다. 나는 체코에서 육로로 슬로바키아를 거쳐 폴란드로 들어섰는데, 폴란드는 유럽 어느 나라보다 물가가 싸서 숙박이나 음식비 등에 부담이 적다.
2-1 잠코비 광장 인어상.

약200만 명이 살고 있는 바르샤바 시내는 넓지 않고 치안상태도 비교적 안전해서 도보여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이건 버스나 전차 등 사람이 많은 곳에서의 소매치기와 야간열차에서 강도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한국인은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고 알려져서 가급적 단체로 행동하거나 낮 시간에만 행동하는 것이 좋다. 
3. 성심자가 성당 그리스도 십자가상.

바르샤바 시내관광은 바로크 양식인 바르샤바 왕궁(Royal Castle) 앞의 아름다운 인어상 동상이 있는 잠코비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바르샤바의 수호신인 인어동상에 관한 전설은 아주 오랜 옛날 인어 한 마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다니다가 아름다운 어촌을 발견하고 낮에는 어부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강물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세상으로 나와서 구경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어부들이 인어를 해치지 않고 보호해주면서 인어 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할 만큼 바르샤바가 아름다운 도시임을 자랑하는 상징물이다. 광장 주변에는 라지비우 궁전, 쇼팽 박물관, 퀴리 부인 생가, 감옥이자 화약고였던 바르바칸, 성 십자가 성당, 코페르니쿠스 동상, 바르샤바 대학교 등이 있는데, 구시가지에서 남쪽 크라프스키 거리에 있는 라지비우 궁전은 원래 라지비우가의 저택이었으나 현재는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르샤바에서는 ‘3C’를 방문하는 것이 필수 코스인데, 이것은 쇼팽, 코페르니쿠스, 큐리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곳곳에 이 세 사람을 기리는 기념장소와 박물관이 많다. 
3-1 성십자가성당 쇼팽심장.

3-2 성십자가 성당.
라지비우 궁전 근처에 쇼팽의 심장을 보관하고 있는 성 십자가 성당과 쇼팽 박물관 등이 있다. 성 십자가 성당의 정문에는 우리나라 성당마다 흔하게 설치한 ‘그리스도의 고행을 보여주는 12처’ 중 하나인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그리스도상이 있고, 성당 본당 왼쪽 돌기둥 아래에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프레더릭 쇼팽의 심장이 묻혀있다.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약54㎞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프랑스어 교사이던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쇼팽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재성이 있어서 7세 때 작곡과 출판을 했고, 8세 때 공연을 했다고 한다. 엘스너에게서 음악을 배우던 쇼팽은 16세 때 스승의 추천으로 비엔나로 유학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고 1829년 바르샤바로 돌아왔으나, 폴란드가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지자 가족들의 권유로 1831년 9월 파리에 가서 살다가 39세 되던 1849년 결핵으로 죽었다. 쇼팽이 죽은 뒤 그의 여동생이 파리에서 쇼팽의 심장만을 알코올에 담아서 바르샤바의 성 마리아 성당에 묻었는데, 성당은 금․토․일요일에만 개방한다. 성 십자가 성당 부근의 쇼팽박물관은 본래 17세기 바로크 양식인 오스트로스키흐 궁전(Palace Ostorgskich)을 1,2층은 쇼팽의 자필편지, 피아노악보 등 2500여점이 전시하고, 3층은 콘서트홀로 이용되고 있다. 박물관은 화~일요일에 개방하는데, 입장료는 22zl(한화 약7천원)이지만 일요일은 무료입장 할 수 있다. 바르샤바에서 차로 약1시간쯤 떨어진 쇼팽의 고향 젤라조바 볼라마을도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된 것을 복구하여 쇼팽의 생가를 박물관로 사용하고 있다. 
4. 코페르니쿠스 동상.

시가지에서 신시가지 방향의 바르샤바대학 거리에 코페르니쿠스의 동상이 있는 곳에 코페르니쿠스 과학관이 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믿던 중세에 천동설을 부인하고 지동설(地動說: 태양중
4-1 코페르니쿠스.
심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대전환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부유한 상인이던 부친의 덕택으로 1491년 소금광산으로 부유한 도시인 크라쿠프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공부 후, 에르미란트의 주교로 선출된 외삼촌의 추천으로 1497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로 유학한 것이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당시 이론에만 집착하는 스콜라 철학에 반대하며 대학에서 배운 천문학을 응용하여 천체 관측과 궤도 계산을 하는 등 실질적인 학문에 몰두하다가 1512년 귀국 후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1521년에 지동설을 완성했지만, 종교적 탄압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다가 죽기 직전인 1543년에야 세상에 발표했다. 그의 학설은 이후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에 의해서 주장되었는데, 부르노는 1594년에 체포되어 1600년 화형 당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1616년 금서목록에 올랐다가 1835년에야 풀렸다.17.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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