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48>

1.프라하 지도.
체코 수도 프라하(Prague)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 강(Vltava River)은 체코와 독일의 국경인 슈마바 산맥의 해발 1300m의 보헤미아 산에서 발원하여 프라하 30㎞쯤 하류에서 독일 엘베 강(Elbe River)과 합류하는 체코에서 가장 긴 435㎞의 강인데, 독일어로 몰도우 강(Moldau river)라고 한다. 서울의 한강처럼 프라하 시민의 젖줄인 블타바 강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있지만, 프라하성에서 구시가지로 통하는 카를교(Karluv most, Charles bridge)는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프라하에서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1-1 첨탑에서 내려다 본 카를교.
1-2.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

원래 이곳에는 나무로 설치한 유디타 다리(Juditin most)가 있었으나, 강물의 범람으로 다리가 자주 유실되자 1342년 보헤미아 왕 카를 4세(Karl Ⅳ; 1316~1378)가 피터 팔레지(Peter Parler)에게 튼튼한 돌다리 건설을 명령하여 만든 것이다. 프라하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 팔레지는 1357년부터 길이 520m, 폭 10m의 돌다리 공사에 착수하여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어서 공사를 할 수 없는 불편이 없도록 다리 밑을 거대한 교각으로 받치고, 돌과 돌 사이에는 달걀노른자를 섞어서 접착시키는 독특한 공법으로 1402년 다리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돌다리(石橋) 혹은 프라하 다리(Prague bridge)’라고만 불렀으나, 1870년부터 카를 4세의 이름을 따서 ‘카를 교’라고 부르게 되었다(성 비투스 대성당에 관하여는 2017.12.04. 프라하성 참조). 
2. 카를교.

카를 교는 당시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융성하던 구시가지에서 프라하 성을 왕래하는 사람들로부터 통행세를 받으려고 다리 양쪽 입구에 고딕 양식의 첨탑(Old Town Bridge Tower)을 세웠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이 그 첨탑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프라하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카를 교는 최근까지도 사람은 물론 시내버스, 트램이 다녔으나 다리의 안전을 위하여 1978년부터 사람만 통행하도록 했는데, 다리에는 보행자들 이외에도 행인들을 상대로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 거리의 악사들로 항상 시장바닥처럼 붐빈다. 또, 이런 틈을 노리고 소매치기들도 많다. 
2-1. 예수상.

그러나 카를 교가 프라하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16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는 교각마다 예수그리스도 상을 비롯하여 성서 속의 인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동상을 좌우 난간에서 서로 마주보도록 세운 때문이다. 다리를 개통할 당시에는 이런 동상이 없었으나 1683년부터 하나 둘 설치되기 시작했는데, 가장 인기 있는 동상은 예수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15번째 교각에 세워진 얀 네포무츠키(Sv. Jan Nepomucky, St. John of Nepomuk : ?~ 1393) 성인상이다.
2-2. 얀 네포무츠키.
2-3. 얀 네포무츠키 부조.

얀 네포무츠키 성인은 1393년 3월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Václav IV: 1361~ 1419, 보헤미아 왕 1378~1419,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373~1378, 신성 로마제국 황제 1376~ 1400)에 의하여 처형된 대주교로서 그의 죽음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바츨라프 4세가  전쟁을 지휘하며 자주 왕궁을 비우게 되자 왕비가 경호원과 불륜관계를 맺고 임신한 후 얀 네포무츠키 대주교에게 고해성사 했다는 사실을 알고 대주교를 추궁했으나, 말하지 않자 혀를 자르고 돌에 매달아 카를 교에서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바츨라프 황제 집권 시기에 프라하에 교황청이 있었는데, 왕과 대주교간에 마찰이 자주 빚어진 끝에 왕이 대주교를 체포하려고 하자 대주교가 달아나고 대주교대리 얀 네포무츠키가 붙잡혀서 고문 끝에 죽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바츨라프 4세에 의해서 처형된 얀 네포무츠키 대주교의 동상은 순교 300년 뒤인 1693년 카를 교에 세워졌는데, 카를 교에 설치된 30명의 성인 동상 중 최초로 세운 동상이자 유일한 청동상이다. 얀 네포무츠키 대주교는 1729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4. 바츨라프 4세.

카를 교에 설치했던 바로크 시대의 성인 동상들은 사실 1965년부터 프라하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고, 현재 다리 위의 동상들은 모두 복제품들이다. 
3. 카를교 첨탑겸 전망대.

카를 교 첨탑의 구시가지 쪽에 작은 광장에는 적의 공격에 대비한 화약 창고가 있고, 화약 창고 앞에는 카를 교를 건설하도록 명령한 카를 4세의 청동기마상이 있다. 카를 4세는 왕관을 쓰고 청동기마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인데, 이것은 카를 4세가 프라하 다음으로 사랑하던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1848년 카를 4세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3-1. 카를 4세.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의 얀과 보헤미아의 마지막 토착 군주의 누이 엘리자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카를 4세는 31세 때 보헤미아 왕이 되었지만, 39세 되던 1355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트비히 4세를 대신해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Karl Ⅳ; 1316~ 1378, 보헤미아 왕 1346~1378, 신성 로마제국 황제 1355~1378). 그는 일찍 로마와 파리에 유학하여 개화사상을 가졌으며, 프랑스 유학중이던 1323년 프랑스 필립 6세의 누이 블랑쉬와 결혼했다. 그는 선진화된 서유럽의 영향으로 무력 보다 외교술을 이용하는 교양 있는 군주이자 예술과 과학의 적극 후원자로서 1348년 프라하에 중부유럽 최초로 파리 대학, 볼로냐대학과 대등한 대학을 설립하고, 프라하 성을 비롯하여 성 비투스 대성당, 대대적인 프라하 도시건설, 카를 교, 카를 대학교 등을 설치하여 유럽의 변방이던 체코를 유럽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또, 프레드리히 2세 이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없는 대공위 상태를 막기 위하여 신성 로마제국을 구성하는 제후와 왕들 중에서 마인츠(Mainz), 쾰른(Cologne), 트리에르 등 3대 주교(主敎)와 보헤미아 왕, 작센공(Sachsen Duke, 드레스덴 일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伯) (Brandenburg), 팔츠 백(Palz; 하이델베르크 일대) 등 7선제후(Domini Terrae)에게 황제선출 특권을 부여하는 황금칙서(Golden Bull; 금인칙서라고도 함)를 공포했는데, 이후 18세기까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는 보헤미아 왕에게 귀속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3-2 화약고.

카를 4세는 사후 아들 벤첼(바츨라프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프라하 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묻혔는데, 체코는 1993년 EU회원국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체코 화폐 100체코코로나(czk)에 카를 4세의 모습을 넣은 체코인들의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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