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영정. 그가 죽은 뒤 그의 제국은 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멸망하고 만다. 그 과정은 살육의 끝에 맺힌 업보처럼 비참했다.

시황제의 장례가 끝난 뒤 호해는 태자의 신분으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여 2세 황제가 됐다. 그리고 그는 많은 신하와 공자들을 조고에게 맡겨 죄를 조사토록 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거부감을 표시한 이들은 모조리 처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대신 몽의 등 숱한 충신들이 조고의 손에 살육 당했다. 또 시황제의 피를 이은 공자 12명은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공주 10명은 두현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하여 죽었다.

호해의 통치는 말 그대로 참혹한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아방궁을 짓고 직도와 치도를 건설하느라 세금이 더욱 늘어갔다. 부역의 징벌도 그치지 않았다. 거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시장바닥엔 사형을 당한 시체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하지만 그 죽음은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승상 이사는 중승상에 오른 조고의 모함으로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함양시가에서 허리가 잘리는 참형을 당해 죽었으며 삼족을 멸하는 아픔을 겪었다.

2세 황제 호해는 조고의 강요와 핍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일부 기록에는 조고가 독살시킨 것으로 적고 있다.

천하의 간신 조고는 호해가 죽은 뒤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에게 인새(印璽) 즉 옥새를 주고 그를 3세 황제에 옹립했다. 하지만 자영은 즉위 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다 신임하는 신하들과 함께 집으로 문병 온 조고를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자영은 3개월여 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키다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들어온 한조고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그의 삶도 오래지 못했다. 뒤이어 천하를 놓고 유방과 사투를 벌이던 초왕 항우(項羽)가 함양으로 진주하여 유방을 쫒아내고 자영을 죽였다. 이로써 진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206년이다.

시황제의 멀고 먼 천하통일의 계획도, 영생의 꿈도, 권력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 숱한 사람들의 몸부림도, 장구한 세월에 견주어보면 바람처럼 스쳐간 흔적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있음으로 비롯되고 없음으로 사라져간다. 있음은 욕심의 굴레에서 만들어지며 그 굴레에서 팽창된다. 하지만 그 팽창의 발목을 잡는 것도 욕심이다.

욕심의 굴레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 역시 영생을 얻을 것이다. 아울러 영원한 마음의 평안을 획득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며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욕심의 끈은 너무 꼭 잡고 있어도 아니 되며 그렇다고 놓아서도 아니 되는 것이기에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삶이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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