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40>

헝가리 지도.
2차 대전 후 유럽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와 서유럽의 민주국가로 갈라졌지만 1991년 소련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Perestroika: 개혁)으로 소비에트 연방(聯邦)이 해체되자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도 잇달아 개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서유럽 여행 뒤 2013년 처음 동유럽 여행을 나설 때까지도  동유럽 국가들의 해체 사실만 알았을 뿐, 민주국가로 변신하고 더더구나 EU 회원국이 된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외국여행을 하면서 겪는 혼란은 언어의 소통부족 이외에도 인식의 오류에서 겪게 되는 혼란이 적지 않다.

정승열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장
가령 그동안 플로렌스(Florence)로만 알았던 이탈리아의 도시가 영어식 지명이고 현지에서는 피렌체(Firenze)로, 베니스(Venice)는 베네치아(Venzia)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지만, 동유럽 국가들의 젖줄인 도나우 강(Donau)과 다뉴브 강(Danube)이 전혀 별개의 강인 줄 알았다가 도나우는 독일어 지명이고, 다뉴브는 영어 지명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사항조차도 깨닫게 되는 여행 특히, 동유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나우 강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검은 숲’이란 의미)의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유럽을 동서로 가르면서 오스트리아 →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10여개 국가를 약2,850㎞나 지나 흑해로 들어간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본 부다페스트 전경.
동유럽의 첫 여행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에도 서울의 한강처럼 도나우 강이 도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헝가리 대평원(Nagy-Alfold)’이라고 하는 도나우 강 서쪽의 넓은 평야 판노니아(Pannonia) 지방은 BC 35년~BC 9년경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는데, 433년경에 이르러 몽고족의 일파인 훈족(Hun)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재래시장.
우리가 흉노족(匈奴族)이라고 하는 아시아의 기마민족인 훈족은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민족 대이동을 시작할 때 현재의 불가리아·루마니아·헝가리를 탄생시켰다. 훈족의 일파인 마자르족이 896년 판노니아를 정복하여 오늘날의 헝가리를 세운 것인데, 헝가리는 1896년을 건국한 해로 삼고 있다. 헝가리(Hungary)란 국명도 유럽을 정복하여 유럽인들을 놀라게 한 Hun족, Gary는 ‘대평원’을 의미해서, 결국 헝가리는 ‘훈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시장풍경.
그러나 헝가리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와 같은 반도국가(半島國家)도 아닌데, 건국이후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외침과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불행의 역사였다. 헝가리는 마자르족의 지도자 아르파드 대공(Rpd: 845~907)의 후계자 중 하나인 게저 대공(Geza: 972~997)의 아들 성 이슈트반 1세(Saint Stephen I; 970~ 1083)에 이르러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2세의 후원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1001년 최초로 헝가리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시장풍경.
하지만, 1241년 몽골의 침입으로 벨러 4세(Bela1 Ⅳ: 1206~1270)는 왕궁지 에스테르 곰을 넘겨주고 도나우 강 남쪽으로 쫓겨 가서 야트막한 언덕에 왕궁을 새로 짓고 이곳을 부다(Buda)라고 했다. 벨러 4세는 헝가리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헝가리는 1541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술레이만의 침략으로 부다 지역이 함락되면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도나우 강 서쪽의 로열 헝가리(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는 부다 지구를 포함한 구헝가리 왕국(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아래서 큰 자치를 누리는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한 터키 보호령(1570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으로 갈라져서 그 식민 지배를 받았다.

시장풍경.
17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전부를 차지하더니, 1867년부터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 Monarchy)이 되어서 1918년 11월 합스부르크 왕조가 해체될 때까지 식민체제가 지속되었다(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 관하여는 2017. 03.17.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 참조).

시장풍경.
사실 일찍부터 민주화 된 서유럽과 달리 최근에야 개방된 동유럽 국가들은 오랜 역사와 함께 유적과 유물이 많지만, 아직 유물과 유적지를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이 많이 부족했다. 오래 전부터 해외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적지를 소개하는 도록(圖錄)을 구입하곤 하는데, 도록을 구할 수 없는 곳도 많았다.

게다가 인천 국제공항에서 동구권은 아직까지 국적기가 체코의 수도 프라하 행 직항노선만 있을 뿐인데, 일정상 직항노선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육로로 오스트리아를 거쳐 헝가리로 입국하게 되었다. 물론, 또다시 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를 복습하던 반복한 이점도 있지만 일정의 많은 시간을 빼앗기기도 했는데, 부다페스트에서 묵은 후너호텔(Hotel Hunor)은 개방 전에는 10층 건물에 150개의 객실이 있는 최고급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이 묵는 대중호텔로 변했으나 시설은 제법 품위가 있었다.

국회의사당.
부근에 오페라하우스, 의회 건물이 있고, 또 시내버스 정류장도 가까이에 있어서 편리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유목민의 원형 막사인 게르(Gier)처럼 만든 로비에서 간단한 음료수나 주류를 마실 수 있도록 한 구조였다.

헝가리인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마자르족은 외모가 검고,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콧대가 낮고, 태어날 때 몽고반점이 있는 등 아시아민족의 특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아시안들처럼 성(姓)이 먼저이고 이름을 뒤에 쓰고 있었다. 또, 음식도 매운 맛의 파프리카를 즐기는 등 아시아인과 비슷했는데, 이튿날 아침 호텔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옆 골목에서 재래시장이 열리는 것을 보고 직접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고추, 마늘, 배추며 온갖 채소들을 보고 주민들의 삶을 실감할 수 있은 것은 헝가리인들이 아시아 유목민의 후예임을 알게 해준 큰 경험이었다.

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하면서 쿤(Kuhn Bela)이 공산국가를 수립했으나 4개월 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에 복귀했다. 그러나 국토의 71%를 빼앗긴 약소국 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 수차에 걸쳐 민주화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소련이 해체되자 1989년 5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철의 장막을 없앴다. 그리고 그해 8월 민주주의헌법으로 개정하고, 1999년 NATO, 2004년 EU에 각각 가입했다. 헝가리는 면적 93,030㎢로서 남한(98,000㎢)보다 약간 적고, 인구도 서울시인구인 1,000만 명 정도인데,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에만 약180만 명이 살고 있다.

유람선 선착장.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사이로 고지대인 부다(Buda) 지역과 평야지대인 페스트(Pest) 지역을 통합한 지명으로서, 오랫동안 두 개의 도시로 존재하다가 세치니(Szechenyi) 백작이 도나우 강에 380m에 이르는 거대한 현수교를 건설한 후 1872년부터 두 도시가 통합되었다. 다리는 백작의 이름을 따서 ‘세치니 다리’라 하고 통행세를 받다가 1918년부터 무료 통행하게 되었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의해서 폭파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1949년 11월 21일 다시 건설되었는데, 오늘날 부다페스트의 상징물이 되었다. 세치니 다리의 개통으로 두 지역이 통합되어 동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 부다페스트는 1991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고대 건축물과 문화유적이 즐비해서 ‘동유럽의 파리', '도나우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체코의 프라하, 폴란드 바르사뱌 등 동·서유럽으로 통하는 열차와 버스 교통이 잘 발달된 동유럽의 교통의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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