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52>

시골동네에 유서 깊은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문화재가 됐다. 집 주인은 이미 딴 마을로 이사 갔지만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동네 사람들에게 쓰라고 했다. 집의 매매절차가 진행 중이며 전문가로부터 과학과 문화예술을 접목한 복합문화공간이 좋겠다는 자문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네 이장이 집 주인의 친구를 찾아가, 이사할 생각도 없는 옆 동네 사람을 오게 해 달라고 청했다. 집 주인은 물론이고 옆 동네 사람도 황당하고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임연희 교육문화부장
2012년 충남도청이 내포로 이전한 후 5년이 되도록 뚜렷한 활용방안을 못 찾고 쇠락의 길을 걷는 대전시 중구 선화동 옛 충남도청사 이야기다. 충남도청이 이사 가기 전부터 대전시는 몇 차례 용역을 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용역결과 과학과 문화예술을 포괄한 창조적 문화플랫폼으로서의 ‘메이커 라이브러리’로 활용하는 방안이 나왔다. 도청사 부지와 건물을 국가가 매입하도록 ‘도청이전 특별법’도 개정됐다.

이 땅의 현 주인은 충남도인데 정부가 매입하면 문화부가 새 주인이다. 대전시는 문화부와 협의해 이 공간을 잘 활용하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대안을 내놔야 한다. 지난해 말 용역을 마친 문화부는 충남도청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을 전제로 감정평가를 진행 중이며 기획재정부와 국가매입을 조율하고 있다. 용역에만 이미 10억 원이 들었고 복합문화공간 조성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도 곧 시작된다. 대전시도 복합문화공간 조성에 동의했다.

권선택 시장, 김부겸 장관에 문화재청의 옛 충남도청사 입주 요청

그런데 권선택 대전시장이 갑자기 문화재청의 옛 충남도청사 이전안을 내놨다. 얼마 전 대전을 찾은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중소기업청의 대전 잔류와 함께 도청사에 문화재청을 입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2,000여명에 달하는 문화재청 유관기관이 대전으로 모이면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고 침체된 원도심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인 상인들도 문화재청 이전을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인 문화재청과 문화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화재청의 원도심 이전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꿈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전을 검토하지도, 진행된 것도 없다”고 했다. 현재의 정부대전청사에서 이전할 계획이 없으며 대전청사 직원 수도 250명밖에 안 된다. 문화재청 이전으로 2,000여명이 도청사로 모인다는 것은 부풀려졌다. 아직 국가매입이 끝나지 않았고 문화부와 협의도 없이 문화재청 이전설이 나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새 주인이 될 문화부는 "대전시로부터 문화재청 이전과 관련해 들은바 없고 그럴 거면 용역은 왜 했느냐"고 어이없어 했다. 도청사의 현재 주인은 충남도이며 새 주인은 문화부가 될 텐데 권 시장은 행자부 장관에게 이전 계획도 없는 문화재청을 입주시켜 달라고 했으니 관련기관들이 황당한 건 당연하다. 새 주인을 제치고 행자부 장관에게 문화재청 입주를 건의한 것도 문화부로서는 불쾌할만하다.

권선택 대전시장은 지난 달 25일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 대전을 방문했을때 중소기업청의 대전 잔류와 함께 문화재청의 옛 충남도청사로의 이전을 요청했다.
도청사에 문화재청 들어오면 시민 자유로운 출입 어려워

그동안 권 시장의 행적으로 볼 때 이번 발언이 고도의 전략적 판단은 아녀 보인다. 중구 국회의원이던 그는 2012년 총선에서 도청사 철거를 공약으로 내놨었다. 등록문화재를 국회의원 마음대로 철거하는 게 불가능하며 이 때문인지 낙선했다. 2년 뒤 대전시장에 출마한 그는 도청사 철거 대신 한국예술종합학교 중부캠퍼스를 유치하겠다고 했다. 상인들은 현수막까지 내걸며 반겼지만 한예종은 "대전캠퍼스를 설치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시청 직원들과 문화계, 원도심 상인들조차도 권 시장의 문화재청 입주 발언을 미심쩍어한다. 시장이 이런 제안을 하려면 실무선에서 충분한 물밑작업이 이뤄졌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관련부처와의 사전협의는 필수다. 아니면 말고 식의 정책을 마구 던지는 것은 시장뿐 아니라 대전시의 기관 망신이다.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자고 문화부와 약속해놓고 뒤로는 다른 정부기관을 끌어들이는 건 개인 간에도 하지 말아야할 배신이다.

권 시장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도청사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입주는, 담장을 허물고 경관조명을 설치해 시민에게 공간을 돌려주겠다는 그동안의 정책과도 배치된다. 가뜩이나 정부청사 출입이 까다로운 마당에 문화재청이 입주하면 이 공간의 주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정부대전청사의 삼엄한 경비를 보면 담장을 다시 쳐야할지 모른다. 도청이 떠난 지 5년이 되도록 헛발질만 하는 대전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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