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법인 이정 대표 오정균(디트뉴스 자문위원).
나이 60이 넘으면 성정이 순해져서 웬만큼 고까운 소리를 들어도, 또는 보기에 언짢은 눈꼴 신 장면을 목격해도 빙긋이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자님께서 ‘예순 살 부터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이든 들으면 쉽게 이해’를 하는 이순(耳順)의 나이라 하셨다잖은가. 그 말씀대로 그저 예순 살이 되면 저절로 못된 성품이 누그러져서 어지간한 일들은 다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매사에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가며 살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파르르한 성질머리는 여전하고, 조그만 일에도 기분이 나빠져 남모르게 속앓이 하는 경우도 여전한 것을 보면, 내가 耳順의 나이를 넘어섰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어영부영하는 새에 이제 60대 중반에 들어섰다. 평균 수명이 여든에 가까운 요즘 같은 때에 결코 많은 나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보아도 분명 적은 나이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전에 없이 자주 나이를 의식하게 된다. 친구들 모인 자리에서도 ‘우리가 이 나이에...’라는 푸념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가 적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우리 어릴 때에는 지금 우리 나이쯤이면 상노인으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였고, 본인들도 노인 행세를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 시절, 나이가 좀 든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꾸부정하니 뒷짐을 지고 다니셨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오며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를 하면 헛기침만 두어 번 해주면 다 통하던, 어른들의 권위가 저절로 세워져 있던 시절이었다. 혹여 나이 젊은 사람들이 뒷짐 진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혼나기 십상이었으니, 뒷짐은 나이가 연만한 어른들만이 갖출 수 있는 특별한 자세였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나이쯤 된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영 어색하고 볼품이 없어 보인다. 뭔가 뒷짐 지고, “에헴”하며 다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직은 젊은 축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일 게다. 그렇다고 젊은이 행색으로 팔랑거리며 다니는 모습도 꼴불견인데, 결국은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색한 어중간한 나이라는 얘기다. 

지내다보면 이처럼 우리 나이가 아주 어정쩡한 나이임을 느끼는 경우가 참 많다. 일테면 전철 안에서 앞에 앉은 젊은이가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해 올 때,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털썩 앉기보다는 뭔가 민망스러워 대부분 사양을 하고 만다. 그럴 때는 “내가 아직 자리를 양보 받을 나이는 아니지”하는 늙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또 손잡이를 잡고 흔들거리며 서 있는 내 앞에 새파란 젊은이가 앉아 자리를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 채 천연덕스럽게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연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나이 든 어른을 앞에 두고 자리 양보할 생각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 모습이 고깝게 여겨지는 꼰대의 심정이 되어서일 게다.

물론 이 나이에도 새파란 젊은이 취급을 당하며 허드렛일을 맡아 해야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여러 기수가 같이 모이는 오래 된 동창 모임이 있는데, 나보다 한 해 후배가 막내인 터여서 그 모임에 가면 나도 언제나 막내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식사 때가 되어 상을 차릴 때에나, 식사 후 커피라도 타서 돌릴 때면 어쩔 수 없이 쟁반을 들고 나서서 일을 거들어야 되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쟁반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 왔다 갔다 하노라면 나의 허연 머리가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젊지만은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는 어느 때보다도 내 몸의 변화를 느낄 때이다. 좀 가파른 산이라도 오를라치면 예전 같지 않게 숨이 찬다든지, 몸의 이곳저곳이 무단히 아프고, 불편해 진다든지 할 때면 “아하, 나이를 먹기는 먹었는가보다”하는 생각에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어느 모임이든지 나가보면 거의가 최연장자 그룹에 속해 있을 경우가 많아 모임에 나갈 때마다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럴 때면 모임에 꼬박꼬박 나가는 것이 민망하게 여겨지기도 해서 두세 달씩 걸렀다가 나가며 얼굴이나 잊히지 않을 정도로 참석하며 지내고 있다.

또 우리 나이가 참으로 어중간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부모님과 자식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이다. 우리 연배들은 어떻게든지 부모님을 잘 봉양하려 애를 썼고, 또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이며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자식들은 우리를 봉양할 여건과 능력이 되지 않는 세태가 된 반면, 부모님 봉양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신 친구들의 경우 무엇보다도 연로하신 부모님의 봉양 문제가 너 나 없는 고민거리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직접 모시고 사는 친구나, 어느 시설에 모셔놓고 있는 친구나 나름대로의 고민거리는 다 한 짐씩 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각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 주어야 할 공통적인 문제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나라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니 결국은 짐을 지게 된 각자가 알아서 헤쳐 나가야 할 문제인 셈인데 이만저만 부담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를 먼 산 불구경하듯 볼 게 아닌 것이 미구에 바로 내 자신의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불과 몇 해가 지나면 내 처지가 바로 지금의 우리 부모님들이 처한 위치에 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냥 무심코 하루하루를 지내기보다는 뭔가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뭔가를 특별히 준비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맨손체조라도 하며 체력을 유지하려는 시늉을 내보기도 하고, 불요불급한 일이다 싶은 곳에 지출이라도 하게 되면 노후를 위해 좀 더 절약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며 망설이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정작 뭔가를 작정하고 나서서 준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만 불안해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耳順의 경지에는 턱밑에도 가지 못한 채, 이래저래 어중간하고, 어정쩡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중이다. 앞날을 생각할 때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이처럼 대책 없이 나이만 먹다 보면 70이 되더라도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의 경지에 드는 것 역시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착잡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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