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연설 70번 기립박수 받고 떠난 오바마 라스트 신 부러워

필자가 지난 60여 년 간 본 영화 중 감동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아마도 라스트신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물론 훌륭한 라스트신이 아니라도 뛰어난 각본과 연출, 출연진들의 호연, 세련된 카메라웍, 그리고 아름다운 배경음악 등은 영화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우리 마음속 깊이 새겨 있는 영화는 역시 뛰어난 라스트신에 기인한다. 이는 ‘떠남의 미학’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본 영화 중 라스트신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추려보면 역시 최근 것보다는 고전 명화에 많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카사블랑카(1942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제3의 사나이(1949년) 셰인(1953년) 태양은 가득히(1960년) 졸업((1967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년) 내일을 향해 쏴라(1969년) 빠삐용(1973년) 델마와 루이스(1991년) 등 수 없이 많다.  

대부분 40-50년대와 60-70년대 작품들이다. 아무래도 필자가 나이 들어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작품성과 오락성을 두루 갖춰 80년 가까이 지난 아직까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살펴보자.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오스카 8개 부문수상과 최고흥행기록을 세웠다.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의 마지막 이별 장면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고향 타라의 잿더미 현장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남편 클라크 게이블을 보며 비비안 리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하죠?”라고 묻자 게이블은 “솔직히 그건 내 알 바 아니요”라며 무정하게 떠난다. 그러자 비비안 리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라며 재기의 투혼을 보인다. 이때 웅장하고 감동적인 맥스 스타이너의 주제곡이 힘차게 울리면서 엔드마크가 찍힌다.

4000대1의 오디션을 뚫고 여주인공을 따낸 비비안 리는 변덕스러우면서도 깜찍한 스칼렛 오하라를 완벽하게 재현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탔다. 능글능글한 마초연기의 클라크 게이블 역시 더할 나위 없는 남성적 매력을 보여준다. 이 밖에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해티 맥다니엘(여우조연상) 등 출연진 모두가 호연이다. 이 영화는 이후 수십 년간 헐리웃 대작영화의 기준이 되었다.  

2차 대전이 한창인 1942년에 나온 ‘카사블랑카’는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낭만적인 전쟁 멜로드라마다. 모든 장면이 세트촬영을 했음에도 오히려 현지 로케한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는 평이다. 당시 치열한 전쟁으로 현지촬영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으로 아프리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는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가 개봉된 후 추억어린 명화 카사블랑카를 기대하며 이곳을 들러본 관광객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에 착안한 미국의 어느 여류기업인이 지난 2004년 이곳에 영화에 나온 ‘릭 카페’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세계적인 스타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등 주·조연에 유명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이 영화는 인상적인 신이 많다. 주제가 ‘As time goes by’는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는 명곡.

카페에서 나치들의 노래가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에 묻혀 버리는 장면, 보가트가 버그만에게 ‘당신 눈동자에 건배를’ 등도 멋진 장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행장에서의 라스트 신이 가장 인상적이다. 보거트가 여권을 구해 연인 버그만과 그의 남편을 안개 자욱한 가운데 비행기에 태우는 장면이다. 그녀의 남편만 태워 보낼 수 있었지만 연인 버그만을 그와 함께 태워 보내는 신은 너무 멋지다.  

스페인 내전을 그린 헤밍웨이의 원작을 샘 우드가 감독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는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프랑코파시스트정권에 대항하는 좌익 공화파 게릴라에 자원입대한 조단(게리 쿠퍼)과 프랑코파에 성폭행당한 마리아(잉그릿 버그만)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담았다. 비록 3일 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그녀에게 다시 살아갈 삶의 희망을 준다.

이 영화의 멋진 제목은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저 조종(弔鐘)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라고 묻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라는 17세기 영국시인 존 단의 시에서 옮겨온 것이다. 영화에서는 처음과 끝에 커다란 종이 크게 울리는 장면을 클로즈업시켜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그는 공화파 게릴라대원들과 함께 다리폭파임무를 완수한 후 중상을 입고 일행과 떨어진다.  

헤밍웨이는 스페인내전에 공화파로 직접 참여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순진한 마리아와 조단의 불과 3일 간 러브신은 아련하다.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은 가벼운 웃음을 자아낸다. 순진무구한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가 조단(게리 쿠퍼)에게 묻는다. “코를 어디에 둬야 하죠?”(Where Do the Noses Go)라는 대목이나 쿵쿵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이게 대포소리인가요, 가슴이 뛰는 소리인가요” 장면 등..

이 영화 역시 라스트 신이 인상적이다. 중상 입은 조단이 동료대원들을 보내고 안 떨어지려는 마리아를 설득해 보낸 다음 홀로 남아 총을 난사하는 장면은 이후 모든 영화의 교본이 됐다. 또 “마리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자신도 함께 한다”며 그녀를 달래는데, 이는 가톨릭 기도문에 나오는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를 인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캐럴 리드감독의 194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필름느와르 ‘제3의 사나이’는 2차 대전 직후의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명화 중의 명화다. 전쟁의 상처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암시장의 범죄 냄새가 물씬 풍긴다. 또 쫒고 쫒기는 자의 우정과 배신, 거기에 사랑이 얽혀 마지막 파국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조셉 코튼, 오손 웰스, 알리다 켈리, 트레버 하워드 등 출연진도 호화롭다.

캐럴 리드 감독이 비엔나의 한 술집에서 캐스팅한 안톤 카라스의 치타선율 주제곡은 잊을 수 없다. 카메오에 가까운 5분 출연으로 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 역을 훌륭히 해낸 오손웰스와 역시 그의 연인으로 출연한 이탈리아 출신 아리다 켈리의 호연도 영화를 빛낸다. 이밖에도 회전관람차에서 코튼과 웰스가 나누는 스위스뻐꾸기시계 대화, 거대한 하수구에서의 쫒고 쫒기는 신도 볼만하다.  

나는 이 영화의 라스트신을 영화사상 최고로 여긴다. 낙엽 지는 가로수길 한가운데를 바바리코트 입은 한 여인(아리다 켈리)이 걸어온다. 그녀는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는 남자(조셉 코튼)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리고 엔드 마크. 길 다면 긴 1분 30초 동안 대사 한마디도 안 나온다. 죽은 친구(오손 웰스)의 애인을 좋아하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애처로운 모습이 애잔하다.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애절한 치타 선율이 흐르고 대미를 장식한다. 나는 지난 1989년 가을 이 영화를 촬영한 비엔나의 중앙 국립묘지를 가보고 ‘제3의 사나이’ 의 라스트 신을 되새겨 보았다. 그레암 그린 원작에는 두 남녀가 팔짱끼고 걷도록 한 헤피엔딩을 둘의 결합이 부적절하다는 리드감독의 주장에 따라 이를 수정했다고 한다. 천재스타 오손 웰스는 '원더풀 아이디어'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시절에 본 ‘셰인’(1953년)은 서부의 건맨이 악당을 물리치는, 말 그대로 서부극의 고전이다. 영화팬에겐 결코 잊힐 수 없는 서부영화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랄 수 있다. 어릴 적 이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는 영화는 못 봤다. 그저 그런 2류 급 배우이던 앨런 래드는 이 한편으로 대스타의 반열에 끼었다. 게리 쿠퍼, 존웨인 등 190cm가 넘는 거한들이 버티던 당시 래드는 너무 왜소했다.

겨우 170cm의 작은 키였지만 호남형에다 총 빼는 기술이 빼어나(0.4초) 캐스팅될 수 있었다. 최고의 서부극 스타 게리 쿠퍼나 존 웨인은 0.5초였다. 별 볼일 없던 무명스타 앨런 래드를 우수가 가득하고 확신에 찬 정의한으로 이끌어낸 것은 명장 조지 스티븐스(젊은이의 양지, 자이안트)감독이다.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호울이 무대인 셰인은 간단한 내용이나 전설적인 분위기와 신비감이 넘치는 영화다.  

떠돌이 총잡이 래드가 자작농의 땅을 빼앗으려는 악당을 물리치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는 스토리다. 스티븐스의 치밀한 연출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로얄 그릭스의 유려한 카메라 웍, 빅터 영의 감미롭고도 쓸쓸한 음악 등이 어울려 최고의 서부극으로 발돋움했다. 출연진도 더 이상 바랄 수 없다. 래드 외에 진 아서와 악당 윌슨으로 분한 잭 파란스, 그리고 꼬마 브란돈 데 와일드의 명연이 빛난다.

‘떠남의 미학’을 이 영화처럼 극명하게 보여준 예도 드물다. “셰인, 돌아와요 셰인! 아저씨를 사랑해요”라며 달려가며 외치는 죠이와 셰인 두 사람의 이별장면은 너무나 애틋하다. 이와 함께 깔리는 배경음악은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또 은근히 셰인에 호감을 갖고 있던 조이 엄마(진 아서)를 뒤로하고 석양 속에 떠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방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의 이별 신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영화 중 40-50년대의 훌륭한 라스트 신을 살펴보았지만 인상적인 라스트신은 60-70년대에도 꽤 많이 있다. 1960년 르네 클레망이 메가폰을 잡은 프랑스·이탈리아 합작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미남스타 알랭 들롱의 출세작. 일확천금을 노리는 청년의 완전범죄가 떠오르는 시체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니노 로타의 왈츠풍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라스트신이 허망하다.

마이크 니콜스의 1967년도 작 ‘졸업’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여러 주제가가 유명하지만, 파격적인 플롯으로 인해 화제를 모았다. 여자 친구와 그녀의 어머니를 포함한 3각 관계를 다뤘다. 바야흐로 섹스혁명이 일던 60년대이지만 당시에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신인 더스틴 호프만, 그의 애인 캐서린 로스, 그녀의 어머니 앤 밴크로프트의 3각 관계는 당시로선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중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를 빼돌리며 거리로 뛰쳐 달리는 라스트신은 코믹하면서도 파격적.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스카브로 페어’ ‘미세스 로빈슨’ 등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는 청년문화의 감수성을 담은 곡으로 이 영화를 흥행케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폭력의 미학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뉴 아메리칸 시네마다.   

텍사스 북서부 로케이션으로 미국 대공황시대를 훌륭히 재현해 냈다. 대공황 말기 영웅으로 추앙받은 남녀 2인조 은행 강도 보니와 클라이드의 행적과 비극적 결말을 담았다. 워런 비티, 페이 더너웨이와 진 헤크먼, 에스텔 파슨즈, 마이클 J 폴라드 등 조연진의 연기도 빛난다. 특히 경찰의 기관총 세례로 온몸에 총알을 맞아 마치 느린 발레 동작 같은 슬로비디오 라스트신(버네트 거피)은 처절하다.

조지 로이 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1969년)는 대 스타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유쾌한 갱영화다. 쫒고 쫒기는 신이 볼만하고 대비되는 두 인물의 재치 있는 농담과 몸짓은 재미있다. 또 버트 바카락의 주제가 ‘Rain drops falling on my head'는 감미롭다. 볼리비아에서 강도행각 뒤 자신들을 향해 총알을 퍼붓는 군대 한 가운데로 달려 나가는 정지화면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면.  

이밖에 두 탈옥수의 모험담을 그린 ‘빠삐용’(1973년 프랭클린 J 샤프너감독)은 절해고도에서 수백 미터 아래로 뛰어 내리는 라스트 신이 돋보인다. 스티브 매퀸과 더스틴 호프만 두 연기파의 연기대결이 볼만하다.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빠삐용’(스티브 매퀸)의 죄명이 웃음을 자아낸다. 페미니즘 로드무비라는 독특한 장르의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코트감독)는 관객들에 깊은 공감을 준 영화.

위협적인 남편을 둔 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냉소적인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서랜든)는 같이 주말여행을 떠났다가 강간미수범을 살해하고 쫓기는 몸이 된다. 잇단 범죄 끝에 둘은 자동차를 몰고 그랜드캐년계곡을 향해 날아간다. 이 허무한 라스트 신은 오래 남는다. 이 영화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장르를 여성으로 바꾼 게 눈에 띈다. 대스타가 되기 전의 브레드 피트가 단역으로 나온다.  

뛰어난 영화의 라스트 신을 회고하면서 정치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임기 말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난 1월 하순 나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고별연설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항상 어려웠지만 우리는 계속 진보해 왔다”며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비범한 일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취임 때처럼 ‘Yes We Can'으로 마무리했다.

이날 70번의 박수와 “4년 더”를 외치는 청중목소리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퇴임 직전 그의 지지율 55%는 놀랄만하다. 박수 받고 떠나는 오바마의 퇴임을 보고 나는 감동적인 영화의 라스트 신을 연상한다. 우리는 왜 그런 대통령을 갖지 못하는가? 퇴임을 앞두고 5%도 안 되는 지지율을 보인 한심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게 된다. 건국이후 우리의 대통령은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내지 않았는가.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물러난 이승만을 비롯 부하 김재규 총탄에 숨진 박정희, 95년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의 구속, 김영삼 아들 김현철의 비리 혐의 구속 등이 있다. 또 김대중 세 아들의 비리와 구속, 노무현·이명박 두 대통령 형의 비리혐의 구속과 노대통령의 자살 등 어느 대통령도 조용히 임기를 넘긴 경우가 없었다. 대부분 임기 말에 빚어진 것으로 불행한 우리 대통령史를 보여준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임기 말 만신창이가 되어 청와대를 떠난 것. 대부분 아집과 독선, 부패로 인해 지지율이 폭락한 후 세인의 질타를 받으며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임기 말 박수 받고 떠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라스트 신이 훌륭한 영화는 태작(汰作)이 없듯 임기 말 평판이 좋은 대통령은 분명히 훌륭한 대통령으로 회자될 것이다.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볼 수 있을 것인가?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