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내 마음속 아버지

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했다. 어릴 때의 경험이나 기억, 특히 트라우마(상처)는 머릿속에 계속 남아 그 사람의 평생을 가져가는 콤플렉스가 된다고.

 “너희 아버지 산소에도 다녀왔냐?” 내 책을 선물 받은 친구 녀석이 무심코 나에게 했던 말이다. 말인즉 네 책이 출판되기 전에 너희 아버지한테도 다녀왔냐는 의미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당황했다.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인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친구 녀석이 못을 박는다. “한번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니?”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며칠 뒤 아버지의 산소로 향하며 생각했다. 나는 왜 아버지에게 다녀 올 생각을 안했을까? 그때 머릿속으로 카를 융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아프게 하는 원인은 바로 나의 무의식에 있다.” 그랬구나. 그동안 나의 무의식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었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상흔, 그걸 꺼내기 싫었던 거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지만 가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가족이다. 

나는 달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은 시멘트 블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집들이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우리 집은 한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좁은 미로와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 오르막이 절정을 이루는 지점에 있었다. 1936년생인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상이용사였다. 아버지는 두 가지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하나는 술 마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술 깨는 일이었다. 술에 취한 날이면 아버지는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영웅담을 늘어놓곤 했다. 내가 움직이면 빨갱이들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니께. 이 나라를 그렇게 지켰는데 나에게 돌아온 게 뭔지 모르겠당께. 참나 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또래의 남자들이 경험하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등을 밀어드린 기억도 없고, 목욕을 끝낸 후 냉면을 사 먹은 적도 없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떠나지 않은 트라우마. 그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동생이 먹던 과자를 빼앗아 먹으려 옥신각신 하다 동생의 얼굴을 때렸을 때 그 순간 잘 짜여진 각본처럼 술에 취한 아버지가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울음을 터뜨린 동생을 보고 아버지는 빠른 속도로 상황을 파악했다. “에미, 애비는 밖에서 쎄가 빠지게 고생하는데 이것들은 싸움질이나 하고…….”

아버지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나는 손목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아버지의 손은 악어의 턱처럼 강했다.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었다. 아니, 그건 몽둥이가 아니라 도끼였다. 세상에, 자식을 때리기 위해 도끼를 들다니. 손에 잡히는 대로 든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서움이 경련처럼 내 심장을 통과했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딸꾹질이 나왔다. 도망가야 했다. 그래야 맞지 않을 테니까. 아니, 죽지 않을 테니까.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을까. 죽을 둥 살 둥 용을 쓰며 아버지의 손을 뿌리쳤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냅다 밖으로 뛰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등 뒤에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 너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아버지는 나를 쫓아 왔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자를 두들겨 패주기 위한 얼굴이었고, 자신을 상이용사로 만든 자를 짓밟아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엉엉 울며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빠져나와 구멍가게와 세탁소를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는 계속 내 뒷덜미를 붙들었다. “이 자식아! 너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 밑 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달리는 것을 멈췄다. 등 뒤에 아버지는 없었다. 그때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나 혼자 인 것 같아 울음을 터뜨리는 기분. 차가운 밤공기가 내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아지트로 이용하던 빈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어둡고 고요했다. 벽을 등지고 앉아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 올렸다. 질문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아버지는 정말 그걸로 나를 때리려 했을까?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당연하지. 잡혔으면 엄청 맞았을 걸. 그동안에도 그랬잖아. 욕하고 때리고. 이때부터 감정의 흐름이 부정의 궤도에 올라탔다. 엄마는 왜 저런 남자와 결혼 했을까. 그리고 누군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이날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그 자리에서 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울거나, 소리를 질러 분노를 풀어야 마땅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로인해 미움과 원망을 끌어안았다.  그 후 시간이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고1 때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그에 대한 후유증으로 오른손과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일 매일을 술로 버텼다. 결국 세 번째 쓰러진 후 우리 곁을 떠났다.

동이 트던 새벽녘이었던가. 어머니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간밤에 너희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에구, 불쌍한 인간. 셋째야 너그 아버지 불쌍해서 어쩐다냐.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이럴까. 둑이 무너지듯 마음이 함께 무너졌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슬픔이 목울대로 올라왔다. 이럴 거면서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거면서 그렇게 사셨어요? 이게 아버지가 바라던 인생이었나요? 아내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눈이 내렸다. 아주 많은 양이었다. 염을 할 때도, 화장을 할 때도, 장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눈이 내렸다.

 “저 왔습니다.” 임실 호국원.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섰다.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를 종이컵에 따랐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아버지가 돈 많고, 의리 있고, 힘도 센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푸념, 아니면 원망. 아, 나는 무엇을 열망했던가. 심연에는 또 무엇이 있었던가. 그랬다. 상처를 이젠 망각의 늪 속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내 마음의 보호자는 난데, 왜 상처를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넣어 두었을까. 도끼를 들고 나를 쫓아오던 아버지의 모습. 이젠 열 두 살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제게도 잘못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왜 술을 마시는지 이해하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죠. 그래서 잊을 겁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버지.”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걸까.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는 것. 끝까지 응원해주는 것. 비빌 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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