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9>제석사-암용추-용산 십이일민회 석벽
지난 주말 대전의 한 풍수연구회 회원들과 계룡산 남쪽 신도안 주변을 탐방했다. 탐방은 신도안 내의 제석사-암용추-용산 십이일민회 석벽 등의 순이었다. 이곳은 계룡대 영내에 있어 쉽게 갈수 없는 곳이다. 일행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신도안의 제석사(帝釋寺)다.
해봉스님이 군에 맞서 지킨 사찰
네 마리의 용은 각자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팔각등은 속세의 중생들 마음에 등불이 되니
어찌 자비를 따르지 않으리오.
연화는 오랜 세월 속에 불교의 상징이며
힘찬 호랑이는 동양의 상징이다.
‘산은 산이요’라는 뜻은 중생들 마음에
등불 밝혀 부처와 함께 안식하여라.
‘제석사’라는 이름은 1965년 창건 당시 스님이 계룡산 산세가 천황봉으로부터 제자봉으로 연결돼 ‘제석사’로 명명(命名)했다고 전한다. 사찰 주변 모든 것이 신비롭지만 대웅전격인 ‘각왕전(覺王殿)’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이 깨우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지금의 현실과 어찌 그리 맞는지. 엊그제 탄핵당한 그 분을 위해 기도라도 드려야 할 것 같다. 오직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 그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만 위한 기도도량이다.
각왕전(覺王殿)을 구경한 후 이 절의 백미인 뒤편 자연 석굴을 올랐다. 이곳에 서서 일행은 능화(楞華) 스님에게 계룡산과 제석사, 자연석굴, 그리고 약수 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석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해봉(서용준) 스님 덕분이다. 스님은 이 사찰을 지키기 위해 군 당국과 10여 년간 송사(訟事)를 벌여 지킨 주인공이다. 남들은 다 힘들다고 했지만 스님은 뚝심과 불심으로 사찰을 지켜냈다. 지난 날 필자와 아주 자별하게 지냈던 분이다. 스님은 불교에 입문한 이후 국수만 잡수셨고 긴 수염을 자랑삼아 기르셨다.
예전에 이곳에 오면 스님의 크고 또렷한 목소리가 계룡산 주변에 메아리쳤는데 안타깝게도 지난해 돌아가셨다. 스님은 필자에게 계룡산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치시곤 하셨다. 계룡산에 입산한지 70년, 제석사에서 수도한지 40년간을 이 기도터에서 보냈다. 스님에게 속죄(贖罪)의 절을 올렸다.
다시 절로 내려와 각왕전 옆 건물을 보니 ‘약로금(躍爐金)’이다. ‘쇠를 녹인다’는 뜻이다. 아마도 무언가를 절실히 간구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스님에게 물으니 아주 오래전 해봉스님께서 금강산 유점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밖에 나오니 역시 대형 뽕나무가 우릴 반긴다. 아, 해봉스님은 뽕나무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가만히 상봉 쪽을 보니 동쪽에서 올라온 햇빛이 계룡산 형제봉을 환히 비춘다. 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이 새롭다. 제석사 뒤편은 제자봉(帝子峰)이다. 지금이야 아무런 표식하나 없는 작은 산등성이지만 예전에는 대단한 곳이었다.
620사업 시행 전 신도안 내 유명세를 탄 봉우리가 세 개 있는데 바로 제자봉과 신털이봉, 장구산중봉이다. 특히 제자봉은 신도안 대궐터의 주봉으로 봉우리 모양이 한문의 제(帝)자와 같이 생겼다 해서 ‘제자봉’으로 불렀다. 이런 연유로 이 봉우리는 신흥종교 교주와 신도들로 온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던 곳 중 하나였다.
정상에는 돌멩이로 천단을 세워놓고 종교교주들이 신도들과 함께 수도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종교연수원’이다. 지금도 많은 신흥종교 신도들은 이곳에서 보냈던 신비로운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자연이 만든 최고의 작품 ‘암용추’
제일 재미나는 이야기가 수용추에서 실을 던지면 한 시간 후에 암용추에 보인다는 생뚱(?)맞는 이야기다. 암용추를 바라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암용추에 대해서는 지난 번 자세히 했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얼마 전에 번역했던 이인식(李仁植)이 쓴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의 내용 중 암용추 부분만 발췌한다. 그는 수용추는 구경하지 못하고 암용추만 구경했는데 당시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이곳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기울어진 바위에 발을 붙이고 가려니 형세가 매우 위험하였다. 수백 보쯤 가서 다시 벼랑을 따라 내려가니 비로소 널찍하여 앉을 만한 반석(盤石)이 나타났다. 그곳이 바로 자용추(雌龍湫)였다. 물이 가장 위쪽의 봉우리에서 발원하는데, 계산해보니 10여 리쯤 되었다. 그리고 앞에는 높다란 폭포가 몇 층으로 꺾이며 흘러내렸다.
우레 같은 소리와 눈발 같은 물보라를 일으키다가 여기에 이르러 물웅덩이를 이룬다. 웅덩이의 벽면은 전체가 바위이다. 바위의 정중앙은 곧은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둘레가 수십 아름 쯤 되고, 둥근 모양이 마치 절구와 같으며, 깊이가 매우 깊다. 그곳이 바로 용이 나오는 곳이다.
용이 몸을 돌리고 꼬리를 치던 곳에 모두 바위 흔적이 남아 있다. 물가에도 소용돌이 모양의 흔적이 있어 용이 나와서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는 곳인데, 허탄(虛誕)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기이하게 여길 만한 이야기이다. 서로 신기하다고 감탄하면서 한 동안 구경하였다. 시춘(始春)이 상류로 올라가 발을 씻자, 초사가 “상류에서 발을 씻으면 안 되지 않겠어?”라고 하였다. 시춘이 “용이 이미 떠났는데, 뭐가 두려워?”라고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抱腹絶倒)하였다.
着足仄石, 勢甚嶮巇. 行可數百步, 復緣厓而下, 始有盤石, 平廣可坐, 此乃雌龍湫也. 水源發於最上峯, 計當十許里, 而當面飛瀑, 折旋數層, 雷吼雪噴, 到此成泓, 泓面全石. 石之正中通直穴, 其周可數十圍, 其圓如臼, 其深無底, 此爲龍出處也. 轉身㨻尾處, 皆有跡石. 畔又有一渦, 龍出跪膝于此, 誕說不足盡信, 而蓋亦詭異焉. 相與叫奇, 看玩移時. 始春就上流濯足. 樵史曰, 濯足上流無乃不可乎. 始春曰, 龍已去矣, 何畏之有. 諸人皆絶倒.”
일행은 다시 마지막으로 암용추 위편 석벽에 새겨져 있는 ‘용산 십이일민회(龍山 十二逸民會)’ 현장을 찾았다. 경술국치이후 망국의 한(恨)을 품고 계룡산에 들어온 이 분들은 계룡산 신도안에서 당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하신 거룩하신 분들이다. 이 단체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계룡산 4대 사찰 용화사의 눈물
옛날부터 흔히 계룡산의 4대 절이라고 하면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신원사, 남쪽의 용화사, 북쪽의 갑사로 지칭되곤 했다. 하지만 신도안의 용화사는 이전했지만 바로 옆에 제석사가 굳건히 지키고 있어 계룡산 남쪽의 명찰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나 더 희망이 있다면 이 아름답고 신비한 제석사와 암용추가 조속한 시일 내에 일반인에 출입이 허용됐으면 한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