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8> 청량산에서 배울 점

지난 3일 경북 봉화(奉花)의 청량산을 찾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인지라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까지는 몇 번 갔었지만 청량산은 한 번도 가질 못했었다.

이상세계로 가는 길

퇴계선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나라 성리학계의 태두(泰斗)다. 조선의 철학과 한문학을 말할 때 퇴계선생을 알지 못하면 한발도 나갈 수 없다. 공부를 하다보면 퇴계선생이 청량산을 자주 찾아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연구에 매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연유로 퇴계선생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새벽 6시에 출발한 일행은 4시간이 지난 10시에 청량산에 도착했다. 주변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다. 일명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이다.

주차장 옆 팔각정을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읽었던 한시가 눈에 들어온다. 퇴계선생이 말년에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지었다는 ‘망산(望山)’이다. 

何處無雲山  어딘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淸凉更淸絶  청량산이 더욱 맑고 빼어나다네
亭中日延望  정자에서 매일 이 산을 바라보면
淸氣透人骨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퇴계선생과의 첫 만남이다. 필자는 여러 개의 등산로 중 청계사를 거쳐 자란봉-하늘다리-장인봉-금강대-공원관문으로 오르는 노정(路程)을 선택했다.

늦가을이지만 날씨는 더없이 따스했고 가는 곳곳 정겨움이 넘쳤다. 낙엽을 밟으면서 웅장한 소나무를 보면서 오르는 좁은 길은 현세가 아닌 이상세계로 가는 길이었다. 이십 여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청계사의 아름다운 모습이 들어온다. 연꽃 모양을 하고 있는 연화봉(蓮花峰)의 기암괴벽과 함께.
 
청량사 입구에 들어서니 솟대를 만들며 시를 쓰는 김성기 시인이 반겨준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움이고 싶다’라는 시집을 낸 그는 청량산 지킴이다. 약차를 한잔 얻어먹고 밖을 나오니 또 다른 세상이다.

유학자의 학문‧수양장소 ‘오산당’

동서남북 모두가 절경이다. 청량사 앞에는 오늘 필자가 찾고자 했던 ‘청량정사(淸凉精舍)’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김성기 시인에게 안내를 부탁하니 손사래를 친다. 여름에만 잠시 개방할 뿐 지금은 어렵다는 것이다.

‘오산당(吾山堂)’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퇴계선생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유교유적이다. 그를 그리는 수많은 학자들에게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됐던 곳이다. 현재는 도산서원 거경대학(居敬大學)으로 유학자의 강학과 교육이 이어진다. 두 번째로 퇴계선생을 만난 곳이다.
 
청량사 경내에 들어서니 또 다른 세상이다. 대한민국의 사찰이 아니라 중국 첩첩산중의 한 도교사원에 온 듯 착각이 들었다.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인 이 절은 연화봉(蓮花峰) 기슭에는 내청량사(內淸凉寺)가, 금탑봉(金塔峰) 아래에는 외청량사(外淸凉寺)가 다소곳이 있다.

두 절은 모두 663년(문무왕 3)에 원효(元曉)가 창건했다는 설과 의상(義湘)이 창건했다는 설이 병존한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있었기 때문에 중건 등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창건 당시 승당(僧堂) 등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큰 사찰이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내청량사는 대웅전에 해당하는 전각이름이 다소 생소한 ‘유리보전(琉璃寶殿)’이다. 전각을 들여다보니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유리’라는 뜻이 ‘약사여래’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절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나무가 천하일품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극락세계요, 별천지이자 무릉도원이나 다름없었다. 청량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있는 사찰이 아니었다.

500년 전 선생이 밟은 길을 따라

청량사를 두루 구경하고는 시원한 약수를 한 모금 마신 뒤 자란봉(紫鸞峰)으로 향했다. 첫 번째 맞는 급경사 길이다.

절망을 느끼며 그것을 이기리라는 희망을 고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500년 전 퇴계선생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30여분을 힘들게 오르니 능선이 보인다. 다시 힘을 내 막바지 고개에 이르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취의 발걸음이다.

편안한 길을 조금 더 가니 청량산의 꽃 ‘하늘다리’다. 이 다리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갖고 있는 의미 있는 다리다.

먼저 해발 800m지점의 자란봉과 선학봉(仙鶴峰)을 연결한 이 다리는 길이 90m, 높이 70m, 폭 1.2m로 국내에서 가장 길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또 하나는 이 사업의 예산을 산림청과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아니라, 경북유교문화권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는 사실이다. 청량산이라는 의미보다는 퇴계선생의 산이라는 의미로 이런 사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던가.’ 명산이기에 인물이 나오고 인물이 나왔기에 명산이 더욱 유명해졌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하늘다리에 서서 다시 퇴계를 생각한다. 퇴계(1501~1570년)의 학문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인품은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퇴계는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했어도 청량산이 있는 고향 안동을 늘 잊지 못해 돌아가기를 원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있었다. 단양과 풍기군수도 그가 고향 근처로 가기 원해서 온 관직에 불과했다. 그는 산수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꼈고 산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으며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거늘

그에게 유산은 인간 욕망을 억제하고 본성의 깊이를 규명하는 공부였다. 그래서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를 마음 수행, 지식 수행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은 이런 그의 마음을 잘 드러내준다.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미를 알게 되고
行到源頭始覺初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免公等  높이 절정을 찾아감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하늘다리에서 본 동서남북은 방향마다 그들만의 자태를 뽐내며 자랑한다. 더 이상 바라보면 인생무상을 느낄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 고개를 넘으니 청량산의 정상인 장인봉(丈人峰)이다. 이곳에는 정상을 상징하는 멋진 표지석이 하나있다.

다가서니 조선 최고의 서예가인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한 ‘丈人峰’의 글씨체가 보통이 아니다. 뒷면에는 주세붕(周世鵬)이 쓴 ‘등청량정(登淸凉頂)’이 보인다. 단숨에 읽어나간다.

我登淸凉頂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兩手擎靑天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白日頂臨頭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銀漢流耳邊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俯視大瀛海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有懷何綿綿   감회가 끝이 없구나
更思駕黃鶴   다시 황학을 타고
遊向三山顚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다시 장인봉을 지나 금강대로 향한다. 가는 곳곳에 새로 만든 길이 즐비하다. 청량산은 골이 깊어 자연스레 이어지지 못한 것을 가운데는 하늘다리가, 나머지는 새로 난 길이 하나로 만들었다. 가는 곳곳마다 멋진 소나무가 보이면 영락없이 ‘부부송’ ‘삼부자송’ 등 안내판이 서 있다. 심신의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퇴계는 이 산을 유람하면서 구름과 안개가 걷히며 산이 신령한 기운과 교감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조화와 자취를 진정으로 즐겼고 이 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다. 세 번째로 퇴계선생을 만난 곳이다.

필자역시 이 산을 유람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퇴계의 그런 심정은 ‘등산(登山)’이란 시에 적절히 녹아들어 있다. 

尋幽越濬壑  그윽한 곳 찾느라 깊은 골을 넘어가고
歷險穿重嶺  몇 숲을 거듭 뚫어 험한 데를 지났노라
無論足力煩  다리 힘이 피로함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
且喜心期永  마음 기약 이룩됨을 기뻐하곤 하였노라
此山余高人  이 메의 솟은 양이 높은 사람 흡사하여
獨立懷介耿  한 곳에 홀로서서 그 생각 간절하구나.

퇴계의 청량산에 관한 기록 한 가지만 더 언급한다. 그는 1552년 명종 7년에 주세붕의 <청량산 유산록>에 발문(跋文)을 다음과 같이 붙였다.

“위대 하여라, 선생이 이 산에서 얻은 것은! 혼몽한 상태로부터 음양의 기운이 나뉘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기운이 형체를 응집한 이래로 몇 천만 겁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갈무리한 승경과 땅이 감추어 둔 기이한 구역이 바로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야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커다란 만남이 아니었겠는가?

하물며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정말로 이 선경의 모욕이요, 우리 유학자의 수치였다. 선생이 일일이 고쳐 주시고, 통렬하게 씻어내어 주셨으니, 그로써 산신령을 위로하고 정채(精彩)를 빛나게 하신 업적이 얼마나 크냐!“

계룡산이 얻은 교훈

무려 세 시간의 하산 길도 필자를 지치게 하지는 못했다. 내려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달 퍼도 길 곳곳에 퇴계선생의 혼과 자취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대를 지나 하산한다. 길옆에는 퇴계시비가 있고 조각공원이 있다. 내가 배운 유학과 논어의 명귀들이 곳곳에서 눈에 뛴다. 전부 ‘자신을 속이지 말라’,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게 하라’는 것들이다.

청량산의 청량사와 청량정사, 연화봉, 자란봉, 하늘다리, 선학봉, 그리고 정상인 장인봉까지. 깊어가는 가을날의 아름다운 정취였다. 더구나 가는 곳곳 퇴계선생을 만나는 기쁨은 기대보다 두 배였다. 또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이젠 퇴계선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좀 갚은 기분이다. 귀로에 인근의 청량산 박물관을 들렀다. 도립공원인 청량산에 비하면 박물관이 제법이다. 헌데 국립공원인 계룡산에는 그 흔한 박물관 하나도 없으니, 서운한 감정이 북받친다.

난 청량산에 가서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퇴계선생이 청량산을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룡산의 인물을 만들라는 엄명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는 계룡산박물관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필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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